아이,나의 흑백필름

아빠, 산타할아버지도 한국말 할 줄 알아?

dangunee 2008. 12. 25. 11:17

1.
이틀전 휴일 아침.
오랜만에 아침에 늦잠을 자려니까 유치원생인 딸이 등 위에 올라탄 뒤 작전에 돌입했다.

"아빠, 햄스터 집 사러 가자!'
"아빠, 햄스터 집 사러 가요!"

 높은 톤의 아이가 소리에 질러대면서, 마구 흔들어대기 아무리 피곤해도 이불 속에서 배겨낼 재간이 없다.

 딸이 아침에 나에게 용건이 있는 경우는, 대문 밖에 꽂혀 있는 '신문'을 꺼내서 건내는 정도다. 방문을 열고 신문을 건낼 때 '택배 왔어요'라 남자 어른 목소리를 흉내낸 뒤 금방 두고 자기 볼일을 보러 가버리는데, 오늘은 분명 다른 용건이 있었다.

졸린 눈을 부비고 일어나서 좌초지종을 들어보니,
딸의 크리스마스 선물이 '햄스터'로 결정이 된 모양이다.

아내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햄스터 집'을 사러 가자고 이러는 거야?'"
"응."
"그럼, 햄스터는?"
"그건 산타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가져다 주신다고 했어?"
"산타?"

2.
딸은 최근 들어 갑자기 강아지나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키우고 싶어했는데,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서 제 나름대로 '햄스터'를 크리스 마스 선물로 낙점을 한 모양이다.

2006년에 잠깐 두달 정도 햄스터를 키운 적도 있었고, 엄마 아빠가 동생을 낳아줄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애완동물이라도 꼭 얻어내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찬 요 며칠이었다. 며칠 전 유치원에 산타할아버지가 선물을 주고 간 것이 결정타였다. 그 이벤트가 있은 후로 친구들끼리 올해 부모한테는 뭐를 받았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한바퀴 돈 모양이었다.

 이에 따라 '햄스터집'은 아빠가 사주기로 했고, 햄스터는 '산타할아버지'가 선물로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산타할아버지가 다 사주면 부모로서 또 따른 선물을 해줘야하기 때문에 역할분담을 한 것이라는 게 아내의 설명.

아닌게 아니라. 딸은 이미 자신이 받을 선물이 들어갈 양말에 편지를 써서 넣어두었다.





* 딸이 만든 '산타할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
  편지에는 '햄스터 2개(?)'가 갖고 싶다며 그림까지 그려 놓았다 -_-;



그런데,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차피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도 부모가 사와야 되는데,  햄스터 집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양말은 있을리 없고, 약속대로 햄스터만 따로 어떻게 양말에 넣어두지?
 살아있는 동물이니 포장해서 넣어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렸을 때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리라. 새하야 눈이 내리길 기대하하는 크리스마스날, 밤새 누군가가 자신을 위한 선물을 두고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설레게 된다.
 이 시점에서 아이에게 느닷 없이 '산타'는 없고 '아빠가 그냥 사줄게'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었다. 부모로서 상상력을 발휘해야할 시점이었다.

  아내와 긴급 회의에 들어갔다. 아이를 실망시키지 않고, 햄스터와 햄스터집을 같이 사는 방법을 궁리해야했다. 묘안은 산타할아버지가 쓴 편지를 통해서 해결하기로 했다.
 즉, 산타할아버지가 이미 햄스터와 햄스터 우리를 이미 사두었고, 그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편지를 선물 대신 양말에 넣기로 한 것이었다.

 아내는 딸 몰래 컴퓨터를 켜고 부랴 부랴 편지를 작성했다.


3.
우리는 짐짓 모른 체 하면서 딸을 불렀다.

"어? 채현아, 양말에 새로운 편지가 있나 봐! 산타 할아버지가 벌써 다녀가셨나 본데!"
"어디 어디?"
딸은 선물 받을 양말에서 편지를 꺼냈다.

"와 진짜 편지가 있네? 아빠 뭐라고 써 있어?"
"채현이 너 글씨 읽을 줄 알잖아. 읽어봐!"

'안녕 채현아. 난 산타할아버지야.
 채현이가 쓴 편지는 잘 읽었단다!
 그런데, 햄스터는 살아있는 생물이라서, 양말에는 넣기 힘들단다.
 오늘 아빠와 같이 아래 그림이 그려진 가게에 가면 햄스터가 있을테니 그걸 가지고 오렴'


한글을 어느 정도 읽을 줄 아는 딸은 띄엄띄엄 읽더니...

"아빠! 오늘 산타할아버지가 햄스터하고 집하고 있는 곳에 가면 된대!!!"
"어, 그래? 좋겠네"
"응"

그런데, 딸이 의외의 일격을 가해 왔다.

"근데, 아빠! 산타할아버지 한국말도 할 줄 아네?"
헛....그...그건!...(엄마가 편지를 썼기 때문에 읍!!)
여기서 밀리면 안되지!!!

"으응....그럼! 당연히 산타할아버지도 한국말 할 줄 알지!"
"어? 지난 번에 유치원에 오신 산타할아버지는 영어로 말했는데?"

얼마 전 유치원을 방문한 사람은 푸른 눈의 서양인이었고,
영어로 아이들에게 말을 했는데, 영어를 할 줄 아는 일본인 엄마가 통역을 해준 모양이었다.

나는...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렇게 말했다.

"..산타할아버지는 세계 여러나라 말을 다 할 줄 알아!!! 안 그럼 어떻게 전세계 아이들에게 선물을 주겠어?"
"응...그렇구나....신기하다..."

"그럼 아빠, 산타할아버지가 얼른 여기로 햄스터 가지러 오래!"

아이는 의문을 갖는 것도 잠시, 햄스터를 사러간다는 사실에 들뜨기 시작했다.

 우리는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서둘러 전철로 세 정거장쯤 떨어진 곳에 있는 '애완동물 전문점'에 갔다.


* 애완동물 전문점

4.
그런데, 산타할아버지의 지시와 달리 애완동물샵에서 우리 가족이 산 것은,
'햄스터'가 아니라...조그만 '미니토끼'였다.

막상 햄스터를 하주려고 했지만, 교육적인 측면해서 '토끼'가 더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서였다. '햄스터'는 관상용이지만, '미니토끼'는 성장함에 따라 아이과 함께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산은 4배 이상 오버를 했다.
 그래도, '햄스터'에서 '미니토끼'로 바뀌었지만, 아이도 '조그만 토끼'를 보더니 무척이나 귀여워했다.

 그럼 '산타할아버지가 사두었다는 햄스터' 이야기는?
 애완동물샵에서 집에서 기를 수 있는 동물을 구했다는 사실만으로 아이에게는 '산타할아버지'이야기는 이미 먼 과거의 일이 되어버렸다.

 딸은 돌아오는 길에 '키키'라고 토끼 이름을 지었고, 우리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키키'에게 근사한 '토끼집'을 만들어주었다.

도쿄에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왠지 '키키' 가 생겨서 한층 포근해진 느낌이다.



* 새 식구가 생겼어요. 밥그릇에 쏘옥 들어갑니다. -_-


끝으로, 딸이 '산타할아버지도 한국말 할 줄 알아'라고 물은 지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그건  딸이 쓴 편지도 '한국어'였다는 거!!!






* 여러분! 메리 크리스마스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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