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1.


 내가 '클래식'이라는 영화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신쥬쿠에 있는 '밀라노'라는 영화관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영화가 있는 줄도 몰랐다.) 


 한 재일교포를 지지하는 진보적인(?) 일본 사람들이 결성한 '한국영화 보는 모임'이 있는데, 나는 일 때문에 영화는 같이 보지 못하고, 뒤늦게 뒤풀이만 참석하고자 신쥬쿠로 간 적이 있었다. 때마침 그 날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고, 영화관에 도착했으나, 아직 영화는 끝나지 않았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영화관에 걸려있는 이러저러한 포스터를 봤는데, 차기작으로 '살인의 추억', '4인용 식탁'이 걸려있었고, '클래식'이란 영화의 컷을 몇개 볼 수 있었다.


 


 일본의 한 영화관에서 비오는 날 저녁, 한국영화의 포스터를 보는 느낌은 좀 남달랐다. 뭐랄까, 이 곳은 최근에 한국영화만 꾸준히 트는 영화관인데, 한국영화 포스터를 좀 보자 나는 문득 종로3가의 단성사 앞에 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영화가 끝나고, 사람들이 나왔다. 몇몇 아는 얼굴이 있었고, 몇몇은 아직 눈물을 닦고 있었다.


 


 '음...현실에 돌아오려면 좀 시간이 걸려요'


 '이 영화...베트남 전쟁과...' 


같이 걸어가면서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나는 이 영화가 첫사랑에 관한 영화이긴 한데, 한국의 역사를 좀 버무린 그런대로 괜찮은 영화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2.


 영화의 표지는 확실히 이와이 순지의 '4월이야기'와 닮았다. 어딘가 모르게 그런 냄새가 난다. 한 청순한 이미지의 여자가 서 있고, 우산을 들고 있고, 웬지 봄비가 내리는 풍경이 그렇다. 이러면 당근, 첫사랑이 시작되는 이야기다.


 


 '클래식'. 


 내가 작년에 가장 재미있게 본 영화다. 물론 60년대가 영화처럼 아름다웠을리 만무하고, 또 베트남전쟁이 단순히 연인들의 이별을 위해 존재하는 배경이라는 것도 인정하기 힘들다. 그들의 못이룬 사랑이 자식대까지 운명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이르면, 썰렁함을 느끼지만, 뭐 이 영화에서 해피엔딩도 그리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아쉬운 기다림이 있고, 진한 그리움이 뭍어난다.


 


 어머니가 남긴 일기장을 훔쳐보는 딸의 시선에는 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아주 어린 딸이 부모의 연애를 이해할 만큼 커서, 오늘의 자기를 있게한 과거의 시간을 추억해보는 것은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때 때때로 일기를 썼던 나는 지금도 그 일기가 나를 향해 던지던 메시지였는지, 혹은 몇백년의 시간을 두고 내가 남긴 흔적을 들쳐볼 그 누군가를 위해 쓴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다. 어차피 쓴다는 것, 그린다는 것은 다 소통을 위한 몸부림이다. 자신을 향해 쓴것이던, 세상을 향해 쓴 것이든지....


 


 한가지 우스운 것은 내가 만약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직 미혼이고, 애인이 없는 상태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꼭 이런 연애를 한번쯤은 해보기를 꿈꾸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런 사랑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빠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지금 이런 영화를 보면, 감상적으로 빠져들기 보다, 상대의 마음을 알고싶어 초조해하던 추억속의 내모습이 화면과 겹쳐진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사랑이야기는 존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존재해야하는, 감독이 보고 싶은 이야기일 뿐' 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이야기에는 진실이 담겨 있지만, 또 절반은 그런 희망으로 가득 차 있기 마련이므로.


 


 


3.


 '한국영화를 보는 모임'사람들 답게 뒷풀이 장소는 역시, 한국 이자카야(선술집)이었다. 일본에서 '한국선술집'이란 '나물'과 '김치찌게'가 맥주 안주로 나오는 곳이다.^^. 퓨젼도 이런 퓨전이 없으나, 한국처럼 나물을 같이 곁들어 먹는 습관이 없는 일본에서 '나물무침'은 좀 특별한 음식이고, '김치찌게'는 더더욱 그렇다.


 나야 집에서 집사람이 해주는 따뜻한 고봉밥에 찌게를 가끔 먹으니, 별로 땡기지 않았지만, 혼자 살았다면 아마 눈에 불을 켜고 허겁지겁 고향음식을 입에 밀어 넣었을 것이다.


 


 '아..너무 감동적이어서 뭐라고 아직 말을 못하겠어요'


 재일교포 여성 한분이 그렇게 이야기 하자,


 '저 영화를 보고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 만큼 젊다는 이야기요!! 내가 해주고 싶은 말은 딱 그 한마디!!'


 라며, 또 한분의 재일교포 남성이 맞장구를 친다.


 


일본사람과 재일교포, 그리고 재일 한국인인 내가 섞인 이 모임은 금새 한국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배용준'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가 옮겨갔다. 내 옆에 앉았던 수염을 멋지게 기른 일본 남자 아저씨는 아직도 '한석규'를 잊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한석규 왜 요즘 안나와요?' 


 


 


 


4.


 60년대는 아버지가 연애를 했던 시절이다. 월남 이야기가 한국사회를 뒤덮던 시기였고, 아버지도 무슨 훈장처럼 월남에 다녀오셨다. 나는 빛바랜 사진속에서 아버지가 군복을 입었던 모습을 본 적이 있고, 철이 들기 전에 부모님의 흑백 결혼사진 같은 거를 보면 한마디로 '클래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클래식. 촌스럽다는 뜻의 고급(?) 표현이다. 적어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고, 클래식하면 좀 어떠냐 하는 당당한 발언도 느껴진다. 부모님들은 '클래식'처럼 애절한 사랑을 한것도 아니고, 멋진 시대를 산것도 아니다. 물론 나 또한 그렇다. 그래서 이 영화에 사회적 메세지까지 바라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 '효자동 이발사'가 한 독재자에 대한 풍자이며 우화이듯, 이 영화는 그냥 그 시기를 무대로 한 '사랑에 대한 수채화'일 뿐이다.


 


 나는 이 영화속에서 그런 메세지나 현실성까지 바라지는 않는다. 복고풍의 연애가 아름답다고 믿지도 않고....단지 아주 중요한 깨달음이 있다면, 지구가 아름답다는 것이다.(이걸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을지...)


 


 카메라에 담겨서 편집된 만큼의 공간속에서 아름다운 것이긴 하겠지만, 지구에는 갈대밭이 있고, 강물이 흐른다. 강물 위에는 반딧물도 날아다니고, 가끔은 연인들을 위해 비도 내린다. 추억을 위해서 편지도 존재하고, 바람은 그들의 머리칼을 흩날려주기도 한다. 내가 매일 걷고 있는 지구와 주인공들이 사연을 전하는 저 곳과 이렇게 다른 것인가. 어쨋거나 지구는 그렇게 해가 뜨고, 그림자를 만들고, 생명을 키우고, 바람이 부는 곳이다.


 


 '아마 비와 구름과 바람이 없는 곳에 사는 외계인이 지구에 잠깐 놀러온다면, 무슨 생각이 들까'


 


 


 


5.  


 일본사람들이 '클래식'을 보고난 뒤의 감상은 역시 '순수한 감정', 일본이 잃어버린 감정이 한국영화에는 남아 있다는 것과 그게 너무 큰 매력이라 한다. 그러니까 개인화되고 파편화되어서 순수한 감정은 이제 일상적인 관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이들에게, '순수한 사랑 혹은 만남'이란, 일본 영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바다 건너 한국영화에서나 겨우 맛볼 수 있다는 것인데......


 


 그런데, 그게 꼭 일본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일까.


 비도 오고, 눈이 오는 한국도 너무나 아름다운 지구의 한 동네임은 분명하건만, 한국에 진짜 그렇게 순수한 감정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일까. 한국도 일본 못지 않게 개인적이고, 타산적이며, 계산적인 뉴스를 쏟아내는 오늘, 과연 일본사람들에게 '첫사랑의 추억'을 선사할 만큼 우리땅이 그렇게 인간적인 곳이었던가.


 내가 그래서 과연 일본인들에게 당신네들보다 우리가 더 인간적이고, 정이 많다고 무슨 브랜드처럼 한류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을까.  


 내가 일본인들이 추억에 빠져 눈물을 흘린 '클래식'을 뒤 늦게 보고, 그들의 감정을 추적하다보니 문득 드는 생각이란..


 


 '지구상에 진짜 사랑이 남아 있다면 그건 단지 이야기 만으로, 편집된 영상만으로 혹시 남아 있는 것은 아닐까.'


 


 인류애도, 조국애도, 민족애도 먹고살기 바쁜 이 시절에 한낮 소음으로 변질되는 불온한 시대속에서, 풍요로운 미국인들과 제1세계의 안락한 삶을 위해 이라크의 사람들이 마구 학살되는 뉴스가 단 몇줄짜리 기사로 편집되어 쏟아지는 이때, 아무 죄책감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이 거대한 '불감증'의 공범자들이 넘쳐나는 이곳 지구!


 


 공룡대신, 이런 인간들이 지배하는 지구라는 별이 정말 아름다워야할 이유가 대체 있기나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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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화를 꾸준히 틀어왔던 신쥬쿠 영화관 '밀라노'....한류의 진원지(?),


당시 살인의 추억이 다음프로로 예정되어 있었다.


 



 


 


 


 


 


 


 


 


 


 


 


 


 


 


 


 


 


 


 


 


 


 


 


 


 


 


 


 


 


 


 


 


 


 


* 난 왠지 이 포스터만 보면 스무살 무렵의 내가 생각난다.


 




Posted by 당그니
인생의 갈림길에서/길에서 만난 연인들 l 2005.07.01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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