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나의 헌팅이야기


생각해보니 벌써 십몇년 전이다.

연애란?

이제 내 생활에서 연애란 단어는 삭제되었다.
뭐 그리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란 이야기다.

그러나, 십몇년전만 하더라도 나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연애였다.
아니 남자인 내가 가장 알고 싶었던 것은 여자란 존재 그 자체였다.

..........................

그 해 봄
긴 고등학교까지의 정규교육을 무슨 군대제대하듯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그해.....

나에게는 단 하나의 꿈이 있었다.
나도 연애한번 해보자 였다.

집안에 여자라곤 엄마 빼놓고 없었고, 삼형제인데다,
중,고교를 모조리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곳을 다닌 데다가
특히 고등학교때는 머리까지 빡빡 밀어서 무슨 교도소 다니는 기분으로 미팅 한번 못해본 나였다.
(지금 생각하면 심한 인권침해라는 생각이 들지만....아 씨바!)

3월이 되자, 나는 우연히 어느 지하철역 검표원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시간은 오전 7시 반부터 10시까지……피크 타임 시간이었다. 지금은 시급이 얼마인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다른 아르바이트보다 꽤 센 편이었다.

7시부터 10시까지 나는 아침 출근시간에 무수히 지나쳐가는 사람들을 보는게 하루를 시작하는 일과가 되었다. 물론 그 당시에는 지나가는 여자 쳐다보기에 정신이 없었지만!…..그렇다고 뭐 가까이가서 말을 걸어볼 용기를 가진 것도 아니었다.
사실 알바 하다 보면 표 검사하는 것보다 주위 지리를 묻는 사람이 더 많게 마련이고, 그거 하다 보면 시간이 다 지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 등뒤를 두드리는 어떤 여자가 있었다.
그녀도 물론 그 근처 지리를 몰라서 물어보는 사람이었으나,
나는 처음에는 아무생각없이 지리를 알려주고, 그녀를 보냈으나,
시간이 좀 지나고 나니...
그녀의 산뜻한 미소가 한참이나 마음에 남았다.

그리고 혼자서는 씨익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아…여자의 미소가 저렇게도 이쁠 수도 있구나.
나중에 내가 연애를 한다면 꼭 저런 미소를 가진 여자랑 해야지 하는 결심까지 갖게 되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아침, 잠깐 스쳐지나가는 순간에도 어떤 느낌을 받는다는 사실….

며칠이 지나고 보니, 나에게 길을 물었던 그 여자가 사람들 틈에 섞여서 나오는게 아닌가. 그 날부터 나의 모든 관심은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달이 다 되어가도록 나는 말한마디 붙여 볼 용기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기껏한다는게 서점가서 연애에 관한 서적을 뒤적거리거나 하는 것이었는데, 미팅 한번 해본적 없는 내가 실전경험이 없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전략을 가질 리가 없지….

그렇게 말못하는 잔인한 3월이 지나갔다.
그리고 4월이 찾아오자, 나는 따귀를 맞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말이나 한번 걸어봐야겠다고 다짐했다. 문제는 내 의사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였다.

당시 친구에게 내가 제안한 여러가지 전략을 이야기 하자, 딱 한마디로
‘너 70년대 소설쓰냐’ 이렇게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편지고 나발이고, 그냥 과감하게 말을 걸어라….
‘대신 말을 쉽게 걸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지!’
‘그게 뭐냐’ 나는 귀가 솔깃해졌고……

‘니가 검표원이니 너의 지위를 이용해서, 표를 잠깐 보자고 그래? 그 다음에 작업을 들어가는거다!!’
‘오………………죽이는군’
쩝…근데 문제는 고양이 목에 과연 내가 용기를 내서 방울을 달 수 있을 것인가 였다. 그때까지만해도 내성적인데다가, 여자에 대한 갖은 환상이란 환상은 잔뜩 품은 나에게 그런 주문은 매우 매우,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래도 한번은 꼭 내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다.

결국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나는 용기를 내서, 말을 걸기로 했다.

드디어 D데이….
나는 아침 출근길부터 긴장한 채로 전철역으로 나섰고, 마음을 몇번이고 다지면서, 알바에 임했다.
그리고 항상 그녀가 사람들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9시 15분….

드디어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듯,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리고 나는 구석에서 한걸음도 못움직인채 숨죽이며 지켜만 보고 있었다 ㅜ.ㅜ
마음은 개찰구에 가 있었으나, 발은 바닥에 붙어서 마네킹처럼 서 있기만 했다.

그날 오후 친구에게 바가지로 욕을 먹고, 나는 심각하게 내 성격에 대해서 철학적으로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대체 뭐하자는 거냐………..왜 사냐…..이런……이대로 물러설순 없다.

다음달 나는 다시 전투에 임하는 자세로, 집을 나섰다.
나는 전날의 처참한 상황을 다시는 되풀이하자 않고자, 오늘만은 아예 7시부터 개찰구 정면에 섰다. (보통 검표원은 구석에 찌그러져 있다가, r기계가 삑 소리를 내면 그제서야 개찰구로 간다)

9시 정각이 되자...나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3-5분 간격으로 열차가 서면, 그후 계단을 올라오는 무수한 사람들의 구두소리가 내 가슴위로 뚜벅뚜벅 들려오기 시작했다.

무수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고동치는 나의 심장소리....

1분,2분,5분,10분..
그리고 15분.....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여지없이 사람들의 무리속에 섞여서 계단을 올라오고 있는 그녀...


나는 심호흡을 한번 크게 한후.....
그럼에도 마구 망설이는 순간
그녀는 드디어 개찰구에 표를 들이밀었고,
동시에 그녀의 몸은 역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이었다.

후...우..............

.
.
나는 에라모르겠다는 심정으로
"저...표 좀 보여주실래요?" (엄연한 직권남용의 현장이죠!! ㅜ.ㅜ)
나도 모르게....말이 튀어 나왔다.

그녀는 아무생각없이
자신이 들고 있던 정기권을 나에게 넘긴 후
다른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표를 들고 돌아선 후..
갑자기 현기증을 느끼면서....
아..이제 어떡한담.
하고 잠시 망설이다가...순식간에 뒤돌아서서서....

그녀에게 다짜고짜 말을 꺼냈다.

"저 사실은,.....그동안 쭉 지켜 봤는데, 언제 시간 좀 내주실수 있으세요?"
내가 생각해도 지극히 유치찬란한 대사가 쏟아져나왔다.
말은 정말이지 순식간에 저절로 나왔다.

그러자
그녀의 반응은.....

순간 너무나 당황해서, 2초정도 말을 못한것 같다.

그리고,
1초 후....
잠시 웃더니....
"언제....요?" 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언. 제.....?
그 말뜻은?...
나의 고백을 어느정도 수락했다는 뜻 아닌가!!

"저기 지금은 가셔야되죠? 내일 개찰구로 나오실때, 다른사람들보다 조금 늦게 오시겠어요?"
"아...네..."
"그럼 내일..뵙기로...."

그러자 그녀는 멋쩍은 웃음을 진채, 저만치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와 같이 총총 사라졌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그자리에 서서
아...친구가 있었군 하고 생각하고는....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야호.....

그 이후의 기분은 굳이 표현하지 않아도 아시리라.

지금도 기억한다.
날씨가 완연한 봄날씨도 접어들던,
아직 봄비가 차갑던,
4월 첫째주 목요일.....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시작되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데이트가 시작되었는데.....

그후 일어났던 갖가지의 사연, 가슴앓이, 혼란, 환희, 절망에 대해서는 읽는이의 몫으로 남기고 싶다.

(사실 그 다음에 어떻게 되었는지부터, 내가 생애 처음으로 술먹고 맛가서 필름이 끊긴 후 비오던 새벽 영화대교를 혼자 걷던 사연까지 쓰려면 시리즈로 나가야 되므로 이정도에서 끝내겠음)


에필로그

1. 내가 그녀와의 데이트에 성공한뒤 혹시 언젠가 나에게 길을 물은적이 있느냐 물었더니
그녀의 대답이란..."잘 모르겠는데..." ㅜ.ㅜ
지금도 나는 내 등을 두드린 사람과 대쉬한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못한다.

2. 그후 본인은 헌팅에 대해 겁없은 인간으로 돌변하게 된다. 드래곤볼에 나오는 사이어인들처럼 전투력이란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기 마련이다.

3. 나에게 첫사랑은 내 자신의 껍질을 깨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즉 연애혹은 여자(남성)란, 소설가 송기원이 이야기했듯 또 다른 자신과의 만남에 다름 아니다라는 말에 공감하면서...............


4. 안느님 사랑이야기에...심심해서 트랙백 날립니다 ㅋㅋ





Posted by 당그니
인생의 갈림길에서/길에서 만난 연인들 l 2005.07.05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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