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의 일본표류기







1.
얼마전에 후배와 채팅을 하다가,
우연히 세익스피어의 4대비극이 뛰어난 점이 바로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이 비극으로 치달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끝내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 과정'을 잘 그렸다고...들었다.

사실, 비극적 결말을 알면서도, 결국 비극으로 갈 수 밖에 없는 주인공이 어디 연극의 주인공 뿐이랴. 이 세상도 그런 구조를 강제하는 무수한 덫들이 넘쳐난다.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란 '햄릿','오셀로''리어왕','맥베스'가 되겠는데 사실 나도 이거 다 읽어본적도 없고, 별로 땡기는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된다.

또 제목부터가 벌써 따분하다.

보통 유명해진거는 '햄릿'의 고뇌에 찬 대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만 알려져 있는데.

이 작품중에서 '맥베스'에 관한 추억에 대해서.....



2.
나는 이 '맥베스'라는 작품을
연극으로 봤는데, 그때 들었던 수업시간의 레포트 제출용으로
할 수 없이 보러 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왕 보러 가는거, 표를 두장을 사서
당시 여친하고 같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이 '맥베스'는 나에게 두고 두고
있을 수 없는 작품이 되어 버렸다.

왜냐, 5월은 푸르고 어린이는 자라던 그때,
그 시간
동숭동 대학로 극장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나는
그녀를 만난 순간 알아챘기 때문이다.

그녀가 변심한 눈빛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연애해보신 분 아실 것이다.


애인이 변심을 하면, 눈빛부터 차갑게 식는 다는 것을.

그리고, 그 눈빛은 천근만근 무거운 돌덩이가 되어서, 절대로 움직이거나 뒤집어 지지 않는 다는 것을.

그래서 정작
연극의 내용은 기억이 하나도 안난다.

이건 시간이 오래되어서가 아니라,
연극을 보는 내내 나는 맥베스가 무대 앞에서 설쳐대는 동안,
어떻게 하면 이 차갑게 식은 눈빛을 돌려놓을 수 있을 까 하는 초조함때문이었다.

정작 비극의 주인공은 저 연극의 주인공이 아니라,
나라는 것을
그래서 연극보다 어쩌면 삶이 더 비극적이고, 그게 자신의 것일때 더욱더 절망적이라는 것을

사랑에 빠져본 사람이면 아실 것이다...

연극은 끝나고,
우리가 극장 밖으로 나왔을때
사람들은 저마다 삼삼오오 맛있는 저녁식사를 하러 즐겁게 흩어지고 있을 무렵

나는 지금 기억에
무언가 사정을 하고 있었던거 같고,
해가 진 하늘은 이미 어두워졌는데, 노오란 하늘이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고,
그리고, 그 연극이 끝난다음 식사를 같이 했는지 안했는지 조차
이제는 기억도 안난다.

단지 오뉴월에 변심한 여인의 눈빛은 이다지도 차갑구나 하는 것만
십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녀의 눈빛 뒤로는 무심하게 자동차들이 지나갔고, 어지러운 간판들만이 어슴프레하게 떠오르는데 .



3.


 그 해 일년전 겨울부터 사귀었던 우리는
그러니까 그 5월을 기점으로 딱 6개월짜리 시한부 연애를 한 셈이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 당시 그녀가 나에게 변심한 것은 나의 사소한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 당시 나를 둘러싼 내 모습 그 자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당시 무엇인가 어설펐던 나는 연애의 시간이 흐를수록
무엇인가 소진되어 가고 있었고, 그런 나를 그녀가 미덥게 보지 않다가 아마 그날, '헤어지자'는 말을 결심하고,
비극의 연극(?)이 시작되는 대학로에 나타난 것이리라.

만약, 내가 좀더 연애 경험이 많았다면, 맥베스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그렇게 초조해하지 않고, 연극에나 몰두했을 텐데 하는 생각도 해보지만.
(아까운 연극표 흑!)


4.


문득 바쁜 일상속에서
잊고 지내던 것들이,
어느날 문득 책상정리나 이런것을 하면 툭 튀어나오는 오래된 사진첩처럼
이렇게,


그때 그 이미지 하나만 또렷이 남아서 떠오르곤 한다.

어차피 상처도 지나면 추억이 되고,
뼈가 되고 살이 되어서.....나중에 청춘사업(?) 밑천이 되기도 하지만,
지금도 그때 그날을 생각하면,

그날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었던 거 같고,
그리고 그렇게 우리의 연애가 끝났다는 것을 일방적으로 선고받았다는데
분개하면서도 어쩌지 못했고 가슴만 아파했던 내가 보이고,
또 그런 경험이 차곡 차곡 쌓였으니까,
이제 나이가 들어서 왠만한 충격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게 아닌가
생각해본다.

후배가 우연히 꺼낸 세익스피어의 4대 비극이라는 말은
'맥베스'라는 연극을 떠올리게 했고,
그 연극은 다시 그때의 우울한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단어 하나에 담긴 수많은 사연과
노래 하나에 담긴 수많은 시간들은
때때로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해준다고 믿는다.

그런 시시껄렁한 무용담이라도 있으면
정말 인생이 시시해질때 혼자서 우두커니 앉아서 흘러간 시간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을 수 있는, 소재꺼리는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요즘에는 이런 비극의 주인공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걱정이군.


                                                                                       당그니 씀




Posted by 당그니
인생의 갈림길에서/길에서 만난 연인들 l 2005.08.04 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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