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제 봄비 속을 걸어서 집에 왔다.
빗방울에 촉촉히 젖은 네온 사이로 걷다보면 묘한 추억에 잠긴다.
봄 비!
봄비속을 걸으니 나는 내가 진짜 봄비를 맞던 열여덟 그때를 생각했다.
2.
"6000원입니다"
순간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럴리가.
이 커피숍 커피값은 분명 소개시켜준 누나들이 내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여자라곤 어머니말고 없는 집안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나의 첫 소개팅 자리.
고등학교때 제일 친했던 친구의 누나가 자기 친구의 후배와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두 누나는 잠시 수다를 떨다가 잘해보라며 자리를 먼저 떴다.
난 처음 소개받은 여자앞에서 내심 담담하게 이야기를 해나갔지만, 경험이 없는 것은 숨길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이라곤 시골길과 홍콩펀치,홍금보 같은 기억밖에 없는 나는 미팅이라고는 꿈도 못꿨다. 상대는 달랐다. 고등학교도 남녀공학이었고, 제법 누군가를 만나본 눈치였다. 긴 생머리에 머리칼 끝이 약간 감겨 있었고, 눈빛이 깊었다. 장녀라 했다. 이야기도 대충 끊길 즈음, 상대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뜨자고 했고, 나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계산대 앞에 서서 형식적으로 얼마 나왔냐고 물어본 참이었다.
'세상에 자기들 차값까지 나에게 부담시키다니'
그 자리에서 스타일(?)을 구길 순 없어서, 그냥 6000원을 지불했다.(커피한잔에 1500원하던 때였음)
지갑에는 이제 9000원이 남았다.
그곳은 교대역 근처였고, 그녀가 잘 아는 카레라이스집은 강남역에 있다고 했다.
3.
그녀를 따라 들어간 '카레집' 메뉴를 펼쳐보자 당혹감이 밀려왔다.
5000원짜리 이하 메뉴가 없었다.
어떻게 한담....
내가 알고 있는 매뉴얼 상으로 첫번째 데이트는 남자가 다 부담해야된다.
두개를 시키고 나자, 5000원짜리 카레가 '2'라고 체크된 전표가 테이블 위로 날아들었다.
카레는 금새 나왔고 우린 서로 말없이 먹기만 했다.
도무지 카레 맛을 몰랐다. 카레인지 떡밥인지.
이 상황을 타개해야한다.
내 주머니에는 9000원밖에 없다.
솔직하게 내가 가진돈은 9000원밖에 없으니, 천원만 보태달라고 할까. 아냐 그건 너무 쪽팔린 짓이지. 그러나 현재로선 내가 다 낼 수도 없다.
그때 문득 소개팅 장소로 데려다 준 누나가 길가던 도중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나중에 돈 다 떨어지면 저기 꼬치집 있지. 저리로 데려와. 누나가 아르바이트 하는 곳이든'
그렇다.
여기서는 그냥 더치페이를 하자고 하고, 2차를 내가 사겠다고 해야겠다.
카레를 허겁지겁 삼켜서 그런지, 속이 더부룩했다.
짱구를 굴리느라고 대체 대화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이 안난다.
4.
"저...술은 드시나요?"
"네..왜요?"
"아하...2차를 같이 가고 싶은데, 여기서는 데치페이를 하고 제가 잘 아는 가게가 있는데 거기서 제가 한잔 살께요"
"음...그러세요"
여자는 잠깐 의외라는 듯 갸우뚱하더니 5000원을 내게 건냈다.
휴...일단 5000원 GET!!!
가게를 나오니 아직 겨울의 냉기를 머금은 찬바람이 몰려왔다. 어둠이 바닥에 낮게 깔린 저녁.시계는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부슬 부슬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린 다시 서초역으로 이동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서초역에서 내려서 교대 방향으로 가야한다. 그러나 잠깐 이동하면서 본 꼬치집을 어느방향으로 가야 다다를 수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지금처럼 휴대폰이 있던 때도 아니었다.
그녀를 데리고, A출구도 나갔다가, B출구도 나갔다가.
'저...이 산이 아닌게벼...'라고 이야기 하고 싶었지만, 초면에 농담을 건낼 수야 없지...
좀 지쳤는지...그녀가 불쑥 어렇게 대답했다.
"저기 저 9시까지는 집에 들어가봐야되거든요. 버스 타고 들어갈께요."
"아..네"
역시 반듯한 사고(?)밖에 못하는 나는 그러라고 했다.
"정류장까지는 같이 가 주실꺼죠?"
"네..그래야죠"
다시 그녀를 따라 졸졸 정류장을 찾아 갔다.
5.
"앗 저 가게인데, 제가 잘 아는 가게가..."
그녀를 따라온 정류장 옆에 친구 누나가 일하는 꼬치집가 있는게 아닌가.
짧은 핸드백을 맨 그녀는 힐끗 가게를 쳐다보더니,
"그..그럼 저기 들어갈까요?"
차분한 눈빛으로 가게를 응시하면서 대답했다.
난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술집에 들어가서 같이 몇시간이고 더 있고 싶었지만, 뜬금없이 9시까지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그녀의 말이 맘에 걸렸다.
'약속은 지켜야한다.'
내가 지키겠다고 한 약속은 엉뚱하게도 2차를 사겠다는 약속이 아니라,그녀를 9시까지 맞춰서 집에 들여보내줘야한다는 것이었다. 역시 경험 부족.
"아..오늘은 첫날이고 하니, 집에 혼나지않게 일찍 들어가시는게 좋을거 같은데요"
나는 그렇게 내가 설정한 도덕심이란 기준에 맞춰 버스에 태워서 그녀를 보냈다.
그리고 혼자서 그 누나가 일하는 꼬치집에 불쑥 들어갔다.
6.
"그래 어떻게 되었어? 맘에 들어?"
내가 가게에 들어서자 누나들이 손쌀같이 달려와서 '애프터'에 대해서 물었다.
"아니..누나들 대체 커피값도 안내고 가시면 어떻게 해요. 그것 때문에 오늘 하루 다 망가졌잖아요"
"뭐? 우리 나올때 계산했어!! "
"어머 그 가게 두번 받았나 보네"
.
.
이..이런....X 같은 경우가....
7.
태어나서 처음 한 소개팅 치고 별로 떨지 않고 수더분하게 데뷔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날 이후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는 없었다. 아니 만나주지 않았다.
내 맘에 쏙 드는 상대는 아니었지만, 난 첫번에 차였다는 느낌에 한달 동안은 노란 하늘을 이고 다니는 느낌으로 신입생의 차가운 봄을 났다.
십몇년 동안 난 종종 '그때 누나들이 계산을 했더라면...' 모든게 헝클어지지 않았을텐데 라고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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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산을 통해 보는 세상도 가끔은 운치가 있다. |
그러나, 어제 봄비속을 걸으며 다시 생각해보니, 내 '전제'가 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 웨이터가 이중으로 받지 않았더라도 결과는 크게 틀리지 않았을 거라는 것.
연애란 문득 경험의 집적체이자 인간에 대한 솔직하고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
계산과 상황에 대한 장악만으로 풀리는 실타래 같은 것은 아니다. 웃음이 나왔다.
산다는거 자체가 모든 것과의 연애가 아니던가.
어제,
집 앞 흔들리는 신호등 앞에 섰을때, 그 건너편에는 그때 꼬치집 앞 명멸하던 신호등 아래서 버스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열여덟 살 소년이 있었다.
8.
그해 겨울.
전대협의장 공판이 있던 서초동 법원
호송차가 그를 태우고 법원을 떠나갈때
지지,지원차 공판투쟁에 참가했던 수십명의 학생들 속에 섞여있던 그녀를 우연히 보았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우리들 머리 위로 그해 첫눈이 내렸다.
ⓒ 당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