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의 흑백필름

[스크랩] 아빠와 딸 6. 아빠! 왜 나만 일본어 못해?

dangunee 2008. 7. 4. 11:45

1.
퇴근 후 식빵 하나를 입에 깨문다. 우유도 한잔.
다이어트를 하다 보니 저녁 식사는 아주 간단하다.
그리고 가벼워진 몸.
인생도 이렇게 가끔 가뿐하게 모든 것이 다이어트처럼 리셋이 되었으면 좋겠다.

딸아이가 아빠랑 잔다고 보챈다.

이제 만 6살이 되는 딸아이는 부쩍 커서 밖으로 나가면 초등학생 아니냐는 말을 많이 듣는다.
그래봤자, 예쁜 디자인을 한 물통을 사달라고 하고, 어디 쇼핑센터 가면 자기 눈에 들어오는 예쁜 모자, 옷, 인형, 장난감에 정신이 없다.

딸 옆에 누워서 재우려는데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아빠 왜 난 일본어 못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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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말에 일본으로 건너온 딸은 유치원을 간다고 설레였던 것도 잠시.
일본 유치원에 한달 다닌 요즘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채현아, 왜 유치원에 가기 싫어?'
'응...애들이 안놀아줘
 내가....애들한테 가서 入れて(나도 껴줘)라고 했는데,
 むり!!(무리)라고 친구들이 그랬어.'
그때는 일본말로 뭐라고 해야돼?

즉 딸 이야기는
유치원에 '메이'라고 하는 여자아이를 중심으로 아이들이 노는 데 자기를 잘 안끼워준다는 이야기이다. 게다가 아직 말이 짧으니 뭐라고 반격도 못하고 나서지도 못하고 있는 모양이다.
같은 반에 아직 친한 친구가 없어서 혼자서 놀다 온다고 이야기를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참 속상하다고 한다.

4살때까지 이곳 보육원(어린이집)에서 한국어보다 일본어를 더 잘했고, 지난 1년간 잠시 한국에서 살다왔을 뿐, 아직 어리니까 일본어에 금방 적응하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그게 아니었다.

딸이 잠들기 전에 문득 오늘 나에게 '왜 자기는 일본어를 못하냐'는 말이 아빠로서 별로 해줄 말이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다 잘하는데 왜 자기는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다른 아이들이 다들 갖고 있는 그 어떤 물건이 자기에만 없는 것처럼.

'아냐...채현이는 원래 일본말을 잘했는데, 지금은 잠시 까먹고 있는 거야. 그래서 앞으로 좀더 시간이 지나면 잘 하게 될거야'
라고 이야기를 해줬다.

그러자,
'한국에서는 내가 제일 인기가 많았는데, 여기는 아니야'
라며 달라진 환경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눈치다.

한국유치원에 다닐 때는 한국어로만 아이들과 놀고 한국에 들어간지 한달만에 완벽하게 한국어에 적응해서 문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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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 혹은 외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온 아이들의 엄마들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한국어라는 모국어를 확실하게 하는 수준에서 일본에 건너온 경우는 보통 6개월이상은 걸려야 말을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딸은 내게 일본어를 물어보는 수준이 거의 번역 수준이다.
'이건 일본어로 뭐라고 해?'
'저건 일본어로 뭐라고 해?'
'그건 너무 길어서 다 못 외우겠다'

아이가 보육원을 다닐 때는 일본어로 먼저 쓰면 내가 일일이 고쳐줬는데 이제는 일본어를 알려주고 있다. 한 때 딸이 두살되던 해에 한국어를 제대로 못하고 자라는 게 아닌가 걱정했던 나는 이제 아이의 일본어를 걱정해야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다행히 같은 유치원에 한국인 부모를 둔 아이들이 몇명 있어서 한국말로 떠들 수 있기는 하지만 역시 같은 반이 아니라서 아직 자기 반에 정을 못붙이고 있는 상황이다.

'채현아. 한국말이 된다고 자꾸 다른 반의 한국 아이들하고만 놀면 어떻게 해?'
그러자
'아냐. 그 애들이 한국어로 물어보면 일본말을 가르쳐준단 말이야'라고 당당하게 대답한다.

채현이보다 먼저 이 유치원에 다니는 한국 아이들(혹은 부모 한쪽이 일본인이거나)은 일본어도 잘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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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처음 일본에 건너왔을 때 내게 가장 큰 문제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아내에게 일본어를 가르치는 문제였다.
일부러 일본사람들과 접하는 기회를 늘리기 위해 친한 일본사람 집 근처로 이사까지 했던 나는, 아내가 일본인 회사에 취업을 하고서야 걱정을 놓게 되었다.(사실 이사한 이유로는 집값이 도쿄도 내에서 그곳에 제일 싸기도 했기 때문 -_-)

그로부터 7년
아이가 크다 보니, 이주 생활도 나 혼자만 뭘 잘해서 될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당장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게다가 집에서 일본어로 대화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뜩이나 말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데 말을 늘린다고 부모까지 아이가 못알아듣는 말을 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부부는 내년 초등학교를 신주쿠에 있는 한국학교로 보내야 하나 고민중이다.
도쿄도 통틀어 조총련계를 제외한 한국인 학교는 신주쿠에 고작 하나가 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나는 작년 8월에 썼던 글 - 일본영주권자의 입대와 아이 - 에 나오는 안유상씨 생각이 다시 났다. 일본에 어렸을 때 건너와서 일본학교를 줄곧 다닌 그가 한국에 자원입대를 해서 확인해야만 했던 정체성 문제.

실제로 이곳에서 줄곧 일본인 학교를 다니는 한국인 아이들은, 가끔 한국어로만 떠들 수 있는 교실에 가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한다. 특별히 고민하지 않고 눈치보지 않고 한국말을 해도 되고, 무엇보다 자기들의 가장 든든한 배경인 부모들이 쓰는 말이니까.
 이미 일본어가 유창한 아이들도 한국인학교가 더 편하고 좋다고 한다.
 역시 세상에는 모국어만큼 편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도구는 없는 것 같다.



5
현재로선,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딸의 언어문제.

한 때 아빠와 딸 이라는 글에서, 아이의 모국어를 걱정하던 나는 이제 다시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다. 아빠로서 그저 내가 현재 해줄 수 있는 일은 그저 격려를 해주는 일이며, 그저 지켜보는 것일 뿐이다. 아내와 한참 이야기를 나눈 끝에 일단 지켜보고, 스스로 겪어낼 수 밖에 없는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제는 집 근처에 사는 진우엄마(한국인아빠와 결혼한 일본인 엄마)가 딸 이야기를 듣고 또래집단 사이에서 유행하는 스티커를 사가지고 왔다. 그걸 가지고 다른 또래들과 말이 아직 부족하더라도 서로 스티커를 어울려보라는 것이다. 아내는 자기 자식도 아닌데 신경 써준 진우엄마에게 고맙다며 맘늦게까지 만든 오이소박이를 내일 가지고 가서 전해줄 생각이라고 한다.

깊은 잠에 빠진 딸의 얼굴을 보며....
그래도 한글로 딸이 오늘 내 핸드폰에 보낸 문자를 다시 한번 읽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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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본어가 아닌 한글로 이렇게 아빠에게 6살짜리 아이가 문자를 써서 보낸다는 것만으로도 일본어를 깡그리 잊어버린 지난 1년의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언어란 어쩌면 단 한 사람만을 사랑하겠다는 젊은 애인들의 첫사랑을 닮았다.

쉽게 다른 언어에게 눈길도 주지 말고 오직 자기만을 사랑해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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