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시골길과 홍콩펀치,그리고 홍금보

dangunee 2005. 8. 2. 12:19

1.
'시골길'
내가 고3때 우리 담임 별명이다.
생긴게 '시골길'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별명인데,
(얼핏, 시골길과 사람얼굴과는 그리 매치가 안됨에도, 그 사람 얼굴에는 그게 딱 맞는 어떤, 놀라운 사실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게 학생들이 붙인건지, 선생들이 붙인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대중'들이 붙인 선생들의 별명에는 어떤 기막힌 영감과 집단의 기억이 담겨져 있다.

이 '시골길'은 하필 '물리'가 전공이었는데,
그래서 물리수업은 나에게 한낮에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소리를 들어가며 걷는 멀고 먼 시골길 같이 지루했다.


2.

사실 나는, 조금 우매한 면이 있는데,
그건 아버지가 '문과'보다는 '이과'를 가는게 나중에 취직하는데 도움이 될거라는 조언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험난한 한국사회를 직접 몸소 겪어오면서 느낀 사회의 냉혹함은 가끔 이렇게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에 자식들에게 이전된다. 거기에 낭만이나 어떤 이상이라던가,가 끼어들 틈이 없다. 돈이 벌린다는데..그 길을 가면....

게다가, 나는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두꺼운 책을 읽고도 아무것도 이해못하는 머리라면, 그냥 순탄하게 '이과'를 고르는게 좋을 거라는 순진한 생각도 한몫 했다.
(수없이 떨어지는 포탄같이, 매일 생겨나는 수학공식의 정글 같은것은 아예 생각지도 못하고)

그런데, 이 '이과'라는게, 고등학교 들어오기전부터 '수학정석' 원 정도는 마스터해서 정신없이 나가는 진도에 천천히 승차해야하는 실력이 없으면, 애시당초 걸지 말아야할 도박판 같은 것이었는데, 그런 것까지 천천히 생각할 여유가 없던 나는 그냥 아무생각없이,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이과'를 선택했다.
(뭐 이렇게 선택하는 사람이 한둘이랴. 대부분은 자기 적성과 전혀 상관없이 그냥 분위기 따라서 들소떼처럼 몰려간다)

고3때 또 결정적으로 실수를 한게 있다면,
다른 애들은 '물리'나 '화학'중 하나만 선택하고, 다른 하나는 '지구과학'이나 '생물'등 머리로 이해하기 보다, 어느정도로 '몸'으로 때우자는 타협을 했는데, 나는 그냥 무식하게 '물리,화학' 둘다 선택을 했다.
고2때 화학선생이 조금 재미난 사람이어서, 주기율표도 시시껄렁한 농담과 함께 외웠던 나로서는, 화학은 그런대로 애착이 있었지만, 물리는 전혀 애정도 없었다.
그럼에도 제대로 이해할 능력도 없으면서 괜히 정면승부를 거는 '겉멋'은 나중에 몇배의 보복으로 되돌아왔다.


3.

첫 모의고사때,
나의 물리점수는 20점 만점에 '5점'이었고,
그때 '시골길'한테 불려가서, 실컷 욕을 얻어쳐먹고는, 혼자 아무도 없는 시골길에 내팽겨치듯이, 성적표를 받아서 되돌아왔다.
(나중에는 그럭저럭 괜찮은 점수 받았음 ㅋㅋ)

'시골길'은 맨날 조회시간이나, 종례시간에는 가뜩이나 좁은 미간을 찌부려대며,
그런 정신으로 대학을 가네 마네 하며, 씨부려 댔지만,
내 옆자리 중 몇몇은 '나이트클럽'에서 누굴 만났네 어쩌네 하며, 고딩이 넘지 말아야할 선에 대해서 떠들어 대고 있었다.

일단 시골길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그 다음으로 우리들에게 '공포'로 악명 높았던 선생 둘만 더 거론하기로 하자.

 

4.

'홍콩펀치' 
이게 무슨 소린가.
이 사람은 '국사선생'이다.

그런데 '홍콩펀치'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걸까.

바로, 이 사람한테 한대 맞으면 '홍콩'간다고 해서 '홍콩펀치'다.

그러니까 거의 당시 고3수업 시간을 지배한 분위기는 '국민교육헌장'에서 떠드는 이땅의 중흥을 위한 깨끗한 면학의 분위기가 아니라, '폭력'을 통한 '어린쥐'들의 반항심을 일거에 제압하려는 공포의 전염 같은 거였다.

그 선생, 인간성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하지만,
생긴거는 좀 '강시'비슷하게 생겼는데, 강시와 다른거는 부적대신 교과서를 들고 다닌다는 거였고, '강시'보다 휠씬 얼굴이 검고 넙적대대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수업는 늘 침묵속에 진행되었고,
'홍콩펀치'가 첫수업을 하기도 전에 학생들 사이에는 그의 '명성'과 '효과'에 대해서 익히 퍼져있었으므로, 그리 위험한 '유혈사태(?)'는 사실 학기중에 별로 일어나지 않았다.
(일반 대중의 공포에 대한 각성은 이렇게 빨리도 퍼지고, 쉽게 학습된다)

그런데 문제는 정말이지, 공포 속에서 배우는 '국사'란 국사가 아니라,
정말 '홍콩사'가 아닐까 할 정도로 재미 없었고, '홍콩한자'만큼 외울것만 매일매일 주렁주렁 늘어났다.
한번은 진짜 홍콩펀치가 애들을 때리는 것을 봤는데, '영웅본색'보다 더 리얼한 폭력전이 칠판 앞에서 펼쳐지는 것을 보고, 역시 삶은 영화보다 더 영화답다는 진지한 깨달음도 얻었다.


5.

이야기 나온 김에 마지막으로 '홍금보'
이 사람은 '체육선생'이었다.

이 사람은 진짜 덩치나 얼굴 생김이 '홍금보'같이 생겼고, 목소리는 야리꾸리한 '홍콩영화' 주인공들 같기 보다는, 일본 '야쿠자'영화의 오야붕같이 낮으면서 약간 허스키했다.

'홍금보'의 공포의 무기는 '정권'이었다.
그는 '정권(주먹)'으로 아이들을 가격하는데, 그것도 정확하게 눈에다가 가격을 했다.
단지 '무술'과 차이가 있다면 '눈알'이 튀어나오지 않을 정도로 친다는 것이었지만,
그의 주먹과 아이들의 눈이 부딪쳤을때 새어나오는 둔탁한 소리는 그야말로 한여름의 납량특집처럼 우리들의 피부에 차갑게 달라붙었다.

다행이 멍이 안들 정도로 힘을 조절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맞아도 티가 안난다는게 역시 '홍금보'라는 고수의 솜씨 다웠다.


6.

'시골길'과 '홍콩펀치' 그리고 '홍금보' 트리오가 나에게 지금껏 준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공식이 공식을 낳는 이상한 생성관계를 별로 이해하지 못했던
'물리'에 대해서 실험기구도 없이 알게 해주었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대학입학이라는 지상명제속에서 그런 정신까지 추스릴 여유도 없이, 열심히 외워댔으나.....지금 생각하면 위대한 실습은 매일 학교에서 해주었던 거 같다.

'시골길'이 '학생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며 대걸레자루를 휘감아내리치던 날이면,
선생의 썩어빠진 분노만큼이나 가득 담긴 에너지가 학생들 볼기짝에 그대로 전이되면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깨닫게 해줬고,
가끔 맞고 난 자리가 찌릿찌릿 아파 올때면, '전자기학 법칙'도 쪼금은 이해할것만 같았다.

게다가 '홍금보'에게 주먹으로 얼굴을 맞으면, 만유인력과 관성의 법칙처럼, 그 울림은 한참이나, 머리속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고자 흔들렸으며, '홍콩펀치'의 침묵은 곧 '진공상태'란게 이런거구나 하는 '갈릴레이'도 가정만으로 끝낸 실험을 우린 교실에서 내내 묵묵하게 해내고 있었다.


7.

 다시 '시골길'로 돌아와서,
그런데 '시골길'이 윽박지르거나, 때리기만 하면 좋았는데,
문제는 또 '쩐'을 그렇게 밝히는데 아연실색을 하고 만다.
(뭐 그 학교에서 이 인간 한 사람만 그런거는 전혀 아니었으나, 어차피 내 담임이었으니)

잡다한 추문은 다 빼고서라도,
대학원서를 쓰던 날, 부모님을 모셔오라 해놓고,
어차피 성적순대로 원서를 써 줄꺼면서,
원서기입이 끝나면, 수험생만 먼저 교실을 나오고, 부모와 선생은 또 다른 뒷거래를 했다.

(어차피 다른 부모들도 다 주고 나오는데, 우리 아버지한테만 그러지 말라고도 할 수 없었고, 또 이야기 했지만 남은 몇달간의 자식의 학교생활을 위해서 아버지께서 듣지 않으셨다)

고3 담임 일년만 하면 '프린스'를 뽑는다던 그때,
대입원서철은 '대목'중에 '대목'이었다.
그러니까..그는 겉모습은 '시골길'이었으나, 그날만은 '쩐'을 받아서,
열심히 '비단길'을 깔고 있었던 거다.

'시골길'과 '비단길'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시적 언어같지만,
고3의 교실은 그런 엉뚱한 단어도 전혀 무리없이 화해하는 곳이었고, 또 아무일없이 학생들은 순진하게 공부만 해줬다.


8.

교복은 없었으나, 머리는 빡빡 밀고 3년내내 다녔던 우리들은,
마침내 대입수험이 끝나고, 학교를 떠날때, 교문까지 늘어선 후배들의 박수를 받으며
학교를 나왔다.
그때 우리끼리 말하지 않아도 떠오른 한마디
'뭐 이거 출소하는 거 같구만'
이었는데, 진짜 나는 지금도 그때 '출소'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9.

살다보면, 재미난 일도 없고,
날씨도 덥고, 텔레비젼 채널을 열심히 돌려가며, 코메디를 봐도
썰렁할때, 가끔 자신의 기억을 되감기 해보면,
이렇게,
어처구니 없고,
황당하지만,
아무말 하지 못했던,
진짜 생생한 '코미디'를 만날 수 있다.

스티븐 스필버그도 못만들어낸
20세기형 납량블랙코미디
그 이름 하여..

'폭력과의 조우!!!'

 

ps. 슬슬 더워지네요. 사실 막 찝니다. 아 더워. 납량특집 하는 계절이 다가오는군요
ⓒ 당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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