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록

[스크랩] <도쿄 맑음 11> 왕후의 밥, 걸인의 찬

dangunee 2008. 2. 20. 11:04

1.

이제 제법 살림하는 티가 난다.

두개의 가스레인지 위에 하나는 김치찌개가 끓고 있고 또 하나는 돼지고기가 구워지고 있다.

 

주말에 일이 밀려서 순 라면만 먹었더니 배에서 아우성이다.

직접 조리한 것 좀 위장으로 넣어달라고.

 

퇴근길, 찌라시에 달린 30엔 할인 쿠폰을 보고  '돼지고기'를 샀다.

아. 상추도 사야지. 

 

한국에서도 삼겹살,목살,껍데기구이 등 돼지고기는 많이 먹어봤지만

직접 구워먹는 것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상추위에 고기와 밥과 된장을 같이 넣고 먹으면 입안이 녹는다.

배운게 도둑질이라고 한국식으로

참기름하고 소금을 섞어서 소금장도 만들어서 찍어 먹었다.

 

2.

한때 아내가 싸준 도시락을 점심시간에 펼쳐놓고 먹을때면

회사 동료인 '후지모토'군이 이렇게 한마디 했다.

 

いいなぁ(좋겠당)

'うらやましいなぁ'(부럽네) 

 

그때는 와이프가 싸준 도시락이 얼마나 정성이 들어간 지 몰랐다.

물론 나는 요즘 나 혼자서도 잘 싸온다.

슈퍼에서 냉동식품을 잔뜩 사놓았다가 아침에 부랴부랴 해동시켜서 도시락통에 넣으면 되니까.

 

아내가 도시락을 싸 주던 그때

나는 늘 내가 먹을 양보다 반찬을 많이 싸주는 데에 대해 은근히 불만이 있었다.

 

다 먹고 나서 반찬이 남으면 그걸 처리하기도 힘들고, 더 먹자니 배는 부르고...

'좀 잘 맞춰서 해주지'

 

오늘 내가 싸운 도시락을 열어보니

은근히 반찬 양이 많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아침에 도시락을 쌀 때

가장 먼저 고려하는 것이 반찬의 양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정도 넣으면 부족하지 않을까'

'에이 두어개 더 넣자'

 

반찬이 부족한 것 보다는 넉넉한 것이 좋으니까.

 

문득 혼자서 밥을 먹다 내가 투정을 해도 불만없이 받아주던 아내가 생각났다.

'알았어. 내일부터는 잘 싸줄게'

아내는 분명 그 아침에

내가 밥먹을때 반찬이 부족하면 곤란할 거라는 생각에 넉넉히 싸줬던 것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밥이 잘 안넘어갔다.

 

3.

왕후의 밥, 걸인의 찬

중학교때 이 수필을 읽고 나는 한참동안 이해를 못했다.

 

어른이 되고 보니

세상 그 무엇보다 '정성'이 중요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찬을 살 돈이 없지만 밥만은 정성스레 지어서 밥상을 차렸다는 그 아내의 마음을

이제 나는 조금 알 것 같다.

 

양 보다는 질이

질 보다는 정성이

세상을 좀더 아름답게 한다는 사실을

 

교과서에 적혀있지는 않지만,

이렇게 하루 하루 무언가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살아있게' 만든다.

 

 

 

출처 : 당그니의 좌충우돌 일본어
글쓴이 : 당그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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