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의 흑백필름

일본선생님이 보내온 특별한 숙제

dangunee 2005. 8. 2. 12:17

1.

 지난 주말, 보육원에서 아주 특별한 숙제를 보내왔다. 숙제란 보육원 생활중에 아이들이 쓰는 일상용어 몇개를 한국어로 적어달라는 것이었다. 채현이가 보육원에 가서 선생님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도중에 한국어로 이야기해서 의미가 통하지 않으면 짜증을 낸다고 한다. 내가 '아빠와 딸' 편에서 언급했듯이 우리가족은 일본어나 한국어나 둘 다 의미가 통하므로 답답할 것이 없지만, 역시 보육원에서는 답답했나 보다. ㅎㅎㅎ.. I Win!!

 

 뭐 물어온 단어는 간단한 것이었다. 먹자,자자,똥,오줌,착한아이,상냥하게....아이들과 지내면서 반드시 써야하는 단어들이었다. 물론 그 쪽 선생님들이 한글을 읽을리 없으니, 가타가나로 반은 쪼개진(?) 발음으로 표기를 해야했다. 먹자는 머쿠자, 오줌은 오주무.....채현이가 이해하려나....하긴 채현이도 오줌을 어즁...이렇게 발음하니 그리 틀리지는 않을 것 같다. 어쨋든 보육원 선생님의 실험이 성공할까?

(어즁: 나랏말쌈이 쥥궉과 달라....오줌을 어즁이라 하노라)

 

 

2.

 일단 '특별한 숙제'가 와서 잠깐 유쾌하긴 했으나, 일상적으로 채현이는 급할때, 일본어를 쓰고 만다. I lose!!

 엄마, 아빠가 뭔가를 안 봐주거나, 자신의 행위를 알리고자 할때 '센세에, 미떼!!?(선생님, 보세요) 이렇게 말이다. 채현이에게 어른은 누구나 다 센세에다. 그래서 급할때는 아빠도 엄마도 다 센세에가 된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 외국어를 배우면, 어느정도 의사소통하는데 문제가 없는 수준으로 다가가긴 하지만, 결정적일때, 이를테면, 열이 받거나, 화를 내고 싶을때는 어쩔 수 없이 모국어가 머릿속을 맴돈다. '이런 XXXX' 아무래도 외국어로 욕을 해도 전혀 감정 해소가 안되기 때문인데,물론 내가 그런 육두문자를 쓴다고 해서 이쪽 애들이 알아들을리 만무하다. 결국 혼자 중얼거리는 것으로 끝난다....ㅜ.ㅜ

 

  신세대 재일교포 3세들의 고민을 잘 담았다는 평을 듣는 영화 '고'를 보면, 재일조선인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모국어는 일본어로 쓰는 재일교포 후세들이 겪는 고충이 잘 나와 있다.  조선학교(총련계 학교)에서 일본어 사용을 금지하고 조선어로만 수업을 진행하는데, 한 학생이 문득 질문을 한다.

 '센세에, 웅꼬 시따이 데스!!'(선생님 똥 싸고 싶어요)- 화장실 가겠다 이 말이다.

 그 말을 들은 선생님은

 '일본말 쓰지 말라고 했지'하며 화를 버럭 낸다.

 학생은 아주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웅꼬를 똥으로 말하면 전혀 마려운 느낌이 안나서, 웅꼬라고 하는데 꼭 이런때도 조선어를 써야합니까' 라며 항의를 한다.

 결국 수업시간은 학생과 선생간의 폭력전으로 변하고, 우리에게는 조국따위는 없다고 하며 정체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으로 그 씬은  끝이 난다.

 

 언어는 이렇게 단순히 커뮤니케이션이상의 감정과 느낌을 담고 있다.

 

 

3.

 아직 채현이는 완벽한 언어를 구사하는 나이가 아니라서, 가끔은 일본어인지 한국어인지 모르는 유아어로 떠드는 경우가 많고, 짧은 경우만 그것이 일본어인지, 한국어인지 판별이 가능한데, 대체적으로 일본어 어휘가 많은 것은 확실하다. 주로 보육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고, 또 그곳에서 사회를 배워가기 때문이다. 딸이 중요한 이야기를 할때, 일본어를 쓰면 나로서는 조금 서운한 느낌이 많이 들지만, 그게 꼭 채현이 잘못만은 아니어서 누굴 탓할게 못된다.

 

 이를테면, '엄마 엇쪄(없어)'이러면, 어떤 같은 코드를 공유하는 가족의 느낌이 드는데, '엄마 나이요(없어요)'이렇게 일본어로 이야기하면 왠지 커다란 벽에 닿는 느낌이다. 내가 일본어를 배울때 수없이 들었던 테잎 속의 일본어가 살아나오는 것 같기도 하고, 매일 마주치면서도 여전히 낯선 회사동료들의 언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감성적인 문제이다. 그냥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서운한 감정을 느끼지 않기 위해 해야할 일은 아이와 한국어로 대화를 많이하고, 한국어의 느낌을 전달해주고, 같이 즐거운 놀이를 하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러나,하루 하루 바쁜 일상에 쫒기다 보면 아이에게 전하는 나의 한국어는 아름답거나 정감 있기 보다는 사무적이고, 명령형이 되기 쉽상이다. '빨리 자자' '옷 입어' '뛰지마' 등등. 문제는 결국 다시 나에게 귀결된다.

 아이가 어른의 거울이라 할때, 아이는 모국을 떠나 외국생활을 하는 부모의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있고, 또 그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상태로 공존한다. 부모가 바쁜 만큼, 부모가 시간이 없는 만큼 아이는 그 부족한 몇퍼센트를 다른 곳에서 찾고 채우는 것이므로....

 

 

4.

 한국에도 알려진 재일교포 소설가 '유미리'는 지난 여름 '8월의 끝'이라는 소설을 내놓았다. 그는 10대 자신이 늘 품었던 의문, 나는 왜 일본에 있는 걸까. 나는 왜 죽지 않는 걸까....에 대해 이제야 자신의 오늘을 있게 한 조부에 대해서 추적하기 시작한다. 작가는 자신의 그런 정체성의 혼란의 근원이 된 할아버지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서 풀어낸다. 할아버지가 고향을 버리고 일본에 건너오지만 않았어도, 자신이 일본에서 살 리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이미 반세기 전의 이야기이지만, 한 민족의 정체성을 두고 다른 언어를 쓰는 작가가 근원적으로 마주쳐야 했던 뿌리는 이토록 어려운 문제이다.

(유미리씨는 이 소설에서 또 다른 의미의 한류, 한일간의 역사에 대해서 조용한 항의를 하고 있기도 하고, 이 책에 감동한 일본인들의 리뷰도 나오고 있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한국에서 새벽에 '일본어'를 배우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 후 일본에 건너와 살지 않았다면, 아니면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한국에 돌아갔다면 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빽 투 더 퓨쳐' 현실판을 보는 느낌도 든다. 원인없는 현재는 없다는 사실...

 

 양쪽 언어를 다 써야하는 나나 채현이나 둘다 혼란스럽지만, 좀 재미 있는 일은 나는 아이를 통해 원어로서의 일본어의 느낌이 어떻게 체현되는가를 또 새롭게 배운다는 사실이다. 한 아이가 성장하면서 습득하는 언어의 경로를 보면 문자 보다 부모나 주위사람의 육성으로부터 1차적으로 흡수하고 소화하듯이, 아이가 내게 쏟아놓는 일본어는 역설적이지만, 그 어떤 테잎보다도 정확한 억양과 발음(?)으로 재현된다. 이런 황당한 경우가....ㅎㅎㅎ

 

 혼란이 새로운 창조를 위해 불가피한 것이라면, 그 다음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냥 그런 상황을 견디거나, 모순되는 상황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라 볼때, 아이와  나 사이에 발생하는 언어문제는 현재 생활이 빚어내는 아주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게다가 몇년전 내가 엄연한 선택한 미래가 오늘 아닌가.

 

 아이는 분명 그 누구도 아닌 내가 쏟은 정성만큼 모국어를 사랑하고, 좋아할 것이다. 그런 노력없이 아이가 한국에서 사는 아이들만큼 다양한 말들을 내게 쏟아내길 바라는 것은 어쩌면 엄청난 욕심이지 않을까.

 

 

 

5.

 주말에 실컷 놀다가 '아주 특별한 숙제'를 대충 써서(?) 보낸 다음, 나는 뒤늦게나마 좀더 나은 표현을 연구해서 써 줄껄 하고 후회를 한다. (원래 숙제란게 다 그렇잖아요 ㅎㅎ)

 

 언어를 둘러싼 싸움은 이제까지는 스파링 수준이었고,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링에 오르는 시간이 되었다. 누가 이길까. 채현이는 아빠가 전해주는 수 많은 말들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채현이가 보는 세상의 풍경은 일본어로 기억될까, 한국어로 기억될까.

 

 그냥 둘다 자연스럽게 공존하면 안될까.

 

 하긴 지금도 잘 공존하고 있기는 하다.

 

 '아빠 치가우요(아빠, 틀려요)'

 '고레 개미(이건 개미 - 드뎌 아리를 개미로 돌려놓다. 음하하)'

 

 성철스님왈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라 하셨는데, 일본어는 한국어이고 한국어는 일본어로다.

 채현이 어록입니당.....(애덜이 무슨 구별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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