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렌즈속 일본

8.15 광복절 일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

dangunee 2007. 8. 15. 07:37


 사진은 독립기념관


1.광복절 일본에서는?


오늘은 광복절이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빼앗긴지 36년 후 나라를 되찾은 날이다.
그리고 어언 62년이 흘렀다. 30년을 한 세대라 할때, 해방 된 후 2세대가 흐른 것이다.

일본은 한국에서 참 묘한 감정을 갖게 하는 나라다.

산업구조상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고, 문화적으로도 한류붐이후에 일본이라는 무대는 이제 다른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케이블 TV를 틀면 일본 애니메이션 천지다. 게다가 엔화약세 탓에 일본 여행객은 해마다 늘어만 간다.(작년 기준으로 연 200만명).
겉으로 보기에는 과거에 비해 친근한 이웃처럼 느껴지지만, 한일 양국 사이에는 날카로운 바늘이 솟아있다.

올해는 아베 신조 총리가 참의원 선거 패배후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를 안할 것 같아서 고이즈미 총리때처럼 첨예한 대립은 없을 것 같지만, 독도나 위안부 문제, 역사교과서 문제만 나오면 사정이 달라진다.

어쨌거나 8.15일은 한국인에게 독특한 의미다. 압제에서 해방된 날이기도 하고, 잊어버렸던 자유의 소중함, 국가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주는 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작 36년간 한국을 식민지 지배했던 일본인들은 이날을 어떻게 생각할까.
아쉽게도 8.15일은 일본에게 종전기념일일뿐, 공식적인 휴일이 아니다.
(물론 오봉야스미라 해서 8.15일 전후로 일주일간 대부분 고향으로 내려가서 휴가를 보낸다)

크리스마스는 휴일이 아니지만, 12월 23일 천황생일은 휴일인 나라, 일본. 그러나 8.15일은 일본에게 특별히 기념할 날이 아니다.

오히려 일본이 기억하는 날은 8.15 무조건 항복을 이끌어낸 8월 6일 원폭투하일이다. 그것도 피해자로서.


* 고이즈미 이 사람 올해도 야스쿠니 참배한다네요...-_-;;


2. 원폭투하는 누구의 책임?

일본어 학교 다닐때 일이다.
당시 상급학생들은 대부분 중국과 한국학생들이 대부분이었고 한명만 영국시민권을 가진 여자였다.

수업시간에 일본 중학교 교과서를 간략하게 배운 적이 있었는데, 원폭 투하에 대한 이야기가 수면에 떠올랐다. 수업을 진행하던 선생님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제가 원폭투하에 관해서 놀랬던 점이 한국이나 중국사람들이 원폭이 투하되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점이에요"
"솔직히 그때 일본 본토에는 무기가 없어서 다들 죽창을 들고 국민학생까지 싸우자고 하는 형편인데...이길 수 있었겠어요?"

그러자 대부분의 학생들은
"원자폭탄이 떨어졌기 때문에 일본이 항복한 게 맞습니다. 안 그랬으면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거에요"라고 대답했다.

중국은 일본의 만주침략이후 중일전쟁등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한국은 일본에 의해서 나라가 사라지는 경험을 했으니 그 지점에서는 의견이 일치했다. 일본어학교 선생님도 처음에는 한국사람이나 중국사람이 원폭투하에 대해서 아무런 느낌없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에 대해 이해를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를 한다고 했다.

자, 여기서 '원폭투하가 되지 않았다면 아시아의 해방은 찾아오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또 한가지는 '원폭투하는 누구의 책임인가'이다. 전쟁을 계속 주장한 구일본군 육군의 책임인가, 아니면 '아시아인을 대상으로 새로 개발된 신병기를 실험하고 싶었던 미국인가'이다.


3. 원폭투하의 원흉, 천황제

2004년 겨울, 나는 가마쿠라(도쿄 인근)에서 사코다씨 외에 친한 일본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온천여행이었다. 같이간 일본사람들은 다들 진보적인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술을 먹다가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원폭투하의 책임이 '천황'에게 있다는 것이다.

뭐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으나, 좀더 앞뒤 정황을 따져보기로 하자.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한 일본은 사무라이가 막부를 세운이래 유명무실했던 '천황'을 명실상부한 권력의 중심으로 올려놓는다. 천황은 메이지유신 전 260여개로 쪼개져있던 번(당시 각 다이묘가 지방영주로서 지배하고 있던 지역)을 하나로 통합하는 강력한 매개체였다.
 메이지 유신 후 헌법을 만들때 당시 수상이었던 이토오 히로부미는이 천황제를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고, 모든 헌법보다 천황을 더 상위로 하는 골격체계를 완성시킨다. 이렇게 되면 일본정부의 지도부가 천황이라는 가면을 쓰고, 정치나 경제를 장악하는 것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정부는 천황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키고자 전국순행을 하기도 했고, 천황의 이름으로 교육칙어를 내려보내기도 했다.

 당시 메이지 천황은 훗날 '이토오 히로부미'등이 자신을 농락하면서 주요한 결정을 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아들 다이쇼 천황은 예상보다 지능이 낮아 일본 권력자들을 당혹케 했다는 이야기 있다. 하지만 수천만명의 희생자를 낸 아시아 태평양 전쟁의 핵심인물인 히로히토는 그렇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영리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고 다이쇼 천황이 실제적으로 어떤 의사결정을 하지 못하는 시점부터 그는 천황을 대리해서 정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빨리 돌려서,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기습적인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막이 오른 이래,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이 패했고, 이듬해인 43년 9월 이탈리아가 항복하게 된다. 그리고 1945년 5월 가장 강력한 동맹이었던 독일마저 항복을 하고 만다.

일본 수뇌부는 이미 전황이 기울기 시작한 1943년 말부터 이 전쟁에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자폭탄이 투하될때까지 그들은 왜 항복을 하지 않고 버티었을까.

그것은 바로 그들이 내건 조건이 '국체보호'라는 것 때문이었다.
'국체보호'란 일본어로 코쿠타이호지 '国体保持'라고 하는데, 이것은 바로 일본이 항복할 의사는 있으나 '천황제'만은 인정하고 온존시켜달라는 것이었다. 이 조건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항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즉, 일본은 근대화를 시작한 이래 천황제를 통해서 국민들을 묶어왔고, 황민화교육을 통해서 실체도 없는 천황을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황군을 만들었다. 일본 수뇌부에게 천황제는 더할나위없이 좋은 통치기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합국, 특히 미국측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국 1945년 8월 6일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되고 8월 8일 소련이 공식적으로 대일본전에 참전함으로서 8월 15일 일본은 더 이상 조건없이 '무조건 항복'을 하게 된다.
즉, 일본의 원폭투하 배경 뒤에는 '국민'은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천황제'라는 권력체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일본지배층의 더러운 욕심이 숨어있다.

 실제로 전황이 어려워짐에 따라 일본정부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대본영을 공습에도 끄떡이 없는 나가노로 옮기려고 했었고, 이 공사에 많은 조선인들이 동원되고 죽어나갔다.


4. 역사를 교육하지 않는 일본

문제는 일본 매스컴과 교육체계다.
일본 매스컴이 2차세계대전에 대해서 주로 방영하는 것은 1942년 4월 12일 있었던 도쿄대공습과 1945년 8월 6일 원폭투하에 관한 것이다.

즉 일본이 피해를 당한 입장만 주로 국민들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이다.
왜 일본이 원폭을 맞게 되었는지, 도쿄대공습의 피해를 보여주기 앞서 일본이 일으킨 아시아 태평양전쟁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를 언급하는 것을 보기는 어렵다.

그저 전쟁의 참화가 이런 것이고, 전쟁은 일어나면 안된다는 것일뿐, 누가 전쟁을 일으켰으며 누가 그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인지 언급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일본의 평화박물관이나 그런 전시회를 가면 안타까운 마음이 들 뿐이다.

얼마전에 NHK를 보니, 나가사키에서 원폭 희생자를 기념하는 행사가 경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물론 원폭을 맞은 사람은 민간인이고, 그 중에는 일본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도 많다.
 
그러다 보니, 역사를 잘 모르는 10대, 20대를 중심으로 젊은 우익들이 설치게 된다. 일본은 그저 피해자일뿐이고, A급전범이라는 것은 승리자였던 연합국이 멋대로 규정한 것일뿐 지지 않았다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라는 것이다.

 A급전번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 신사. 이 신사 옆 기념관에서는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노골적으로 '대동아전쟁'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5. 천황의 전쟁책임은 불문에 부치다.

이야기를 다시 천황제로 돌려서,
원폭투하로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맥아더였지만, 그는 천황을 처형하지 않았다.

당시 동맹국이었던 호주나 영국에서는 천황의 전쟁책임을 묻고자 했지만
전범재판에서 미국측 수석검사였던 '죠셉 베리 키난'은 천황의 전쟁책임을 불문에 부쳤고 이것은 당시 맥아더등 GHQ(연합군사령부)의 생각을 반영하고 있었다. 즉, 천황을 미국쪽 입맛에 맞는 통치기구로 인식하고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이 점에서 일본의 불문명한 과거 청산은 미국에게도 일정한 책임이 있다.

따라서 중일전쟁 개전의 책임, 태평양전쟁시 전과에 대해서 환호하고, 수천만의 아시아 민중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히로히토는 패전 전에는 살아있는 신이었다가 패전후 보통사람으로 변신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 평화주의자로 둔갑을 하게 된다.

얼마전 일본 방위청 장관이었던 '규마 후미오'는 '미국의 원폭투하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며 당연시 하는 발언을 했다가 사임을 했는데, 똑같은 질문에 70년대 히로히토는 '원폭투하는 어쩔 수 없다'고 발언하며 당시 원폭피해자드에게 사과한마디 없어 자신의 전쟁책임을 슬그머니 빗겨나갔지만 아무도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일본언론은 없었다.


6. 일본인에게 8.15는?


사실 8.15일은 일본의 패전일이지만 일본이 패전을 했기 때문에 한국이 독립을 하게 된 역설의 날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이제 60년전 지독한 전쟁에 대해서 별 생각이 없다.
8.15일을 전후로 '오봉야스미'라 해서 한국의 추석에 해당하는 명절기간을 보내므로, 떨어져 있는 가족과 함께 만나고 고향친구와 술한잔 기울이는 기간이다. 아니면 오랫만에 해외여행을 떠날 수 있는 휴가이기도 한 것이다.
일본에 살면서 나도 8.15일은 광복절이라는 의미보다 오랫만에 한국을 다녀올 수 있는 휴가라는 느낌이 더 강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8.15는 그렇게 대충 잊혀지거나 단순히 우리가 해방을 맞은 날로 기억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8.15를 전후해서 우리는 두번다시 그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도록 좀더 분명하게 알아둘 필요가 있고 단순히 피해자였던 입장만을 기억해둘 게 아니라 좀더 적극적으로 역사적인 해석을 해둘 필요가 있다.
일본이 자신들의 과거를 기억 하지 않는다면, 우리라도 제대로 기록해두고 알아두어야 한다.

 8월 16일 - 18일까지 나의 일본인 친구 사코상과 함께 일본 교사 등 일본인들이 독립기념관에 한국독립운동사를 배우러 간다고 한다(아래 오마이뉴스 기사 참조)


독립기념관에서 열리는 아주 특별한 역사기행


시간이 되면 나도 이 행사에 참가하는 일본사람들을 만나서 좀더 폭넓게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어볼 생각이다.

E.H.카아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 하였다.
8.15 광복절은 역사가 과거가 아니라 지금도 끊임없이 성찰해야할 현재임을 지금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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