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의 흑백필름

[스크랩] 아빠 이제 공룡 없어

dangunee 2007. 8. 15. 03:36

1.
8월 13일 딸의 생일이었다.

만 5돌.
태어나서 4년은 일본에서 보내고, 1년은 한국에서 지냈다.

1살 되던 해,
딸 엄마가 선언했다.

'나 나가서 일 할 거야!'
'채현이는?'
'보육원에 맞겨야지'

채현이는 8월생이므로 한 6개월간은 사립 보육원에 맞겼다가, 3월 구에서 운영하는 곳으로 옮겼다. 사립은 한달 보육료만 5만엔 정도 하지만 구립은 수입에 따라 2만엔이 채 안되었기 때문.

채현이는 집에만 있다가 '보육원(한국의 어린이집에 해당)'을 다녀온 첫날 오후 8시부터 잠에 빠져들었다. 아마도 새로 만나는 친구들과 신나게 노느라 피곤했을 터이다.

그렇게 3년을 보냈다.

2.
이틀전 '친가'에 가서 형 부부, 부모님과 함께 채현이 생일파티를 해주었다.
TGI 직원들이 와서 노래도 불러주고 사진도 찍어줬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맞는 생일.

아이는 즐거워서 어찌할 줄 몰랐다.

일본에 있을때는 딸과 나, 아내 이 세사람이서 촛불을 켜고 생일 축하노래를 불러줬는데, 여기서는 함께 '축하노래'를 불러주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한국에 있으면 이렇게 아무때나 가족들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좋다.

3.
아이에게 동생(채현이에게는 삼촌)이 선물사라고 줘어준 돈으로 '장난감 바이올린'을 사주었다. '장난감 바이올린'은 바이올린 현을 좌우로 만지면 이미 저장되어 있는 곡이 한소절씩 나오는 제품이다. 아이는 할인점에서 그것을 고른 후 얼른 집에 가고 싶어했다.

문득 돌아오는 차안에서, 딸에게
'오늘 저녁에는 어디를 갈까?'
라고 이야기를 했다.

보통때 같으면 어디든지 가자고 했을텐데, 오늘은 이렇게 대꾸한다.
'가긴 어딜 가. 집에 가야지....'
딸 아이 머릿속에는 온통 바이올린 장난감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오늘 비도 오고, 밤이고,
나는 문득 1년전 딸하고 했던 대화를 떠올렸다.

'채현아, 아빠랑 공룡 잡으러 가자!!'
작년에 NHK에서 공룡 다큐멘타리를 본 후 내가 공룡잡으로 간다니까 자기도 같이 잡겠다며 딸은 공룡의 존재를 믿었었다.

그런데 올해에는 대답이 다르다.

"공룡은 이제 세상에 없어. 다 죽었어."
어라.
아이는 4살때만해도 어두컴컴한 도시 한켠에 공룡이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불과 1년 사이에 '세상에 공룡따위는 없다'고 알게 된 것이다. 아마 유치원에서 알게 된 모양인데, 내가 좀 더 우겨보았다.

"채현아 작년아 아빠랑 공룡잡으로 간다고 한거 기억 안나?"
"공룡은 이제 없다니까"
서로 우김질에 들어가자 와이프가 한마디 한다.

"그만 이야기 해. 애한테 잘못된 정보를 주면 유치원 가서 싸운단 말야!!"
순간 나는 깨갱....
아내의 이야기 맞다.
아이가 유치원 가서 '아빠가 공룡이 있다'고 했다고 우긴다면...

아이의 세계가 이제 무궁무진한 상상의 세계에서 현실로 자꾸 줄어들고 있었다.
그런데 왠지 재미가 없어진다.

물론 2007년 현재 공룡은 없다.
그렇지만 앞으로 아이와 나눌 대화가 상상보다 현실에 관한 것이 더 많아질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섭섭한 느낌도 든다.

정확한 현실인식은 살아가면서 없어서는 안될 덕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더 큰 가능성을 차단하고 바로 눈앞에 있는 것 혹은 자기가 눈으로 본 것만을 세상에 존재하는 것으로 믿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
 
아이가 큰다는 것은 부모로서 대견한 일이기도 하지만,
아이가 가진 커다란 우주가 자꾸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조그만 세계
이를테면 아이에게는 훨씬 먼 미래의 이야기이기지만,
집 평수라던가, 자동차 가격이라던가, 월급이라던가, 회사내 지위라던가.
이런것으로 자꾸 줄어드는 것이 안타까워지는 요즘이다.

그러고 보니, 한편으로 아이의 '상상'을 제대로 키워주는 노력도 한참동안 소홀히 해왔다. 한국에 있다보니 내가 아이와 함께 하지 않아도 '모국어'로 편하게 이야기 나눌 친구들이 많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문득 오늘 1년전 내 블로그에 썼던 '아빤 공룡 잡으러 갔어'을 글을 다시 읽으며 아이를 그냥 놀아주어야할 대상, 키워야할 대상으로 보기보다 같이 좀더 커다란 우주와 상상을 만드는 친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친구가 되면 함께 하는 시간은 그저 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서로 재미있게 노는 시간이 될테니까.


참고> 1년전 썼던 글을 첨부합니다.

아빤 공룡 잡으러 갔어

1.
어제 딸과 함께 공룡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보았다.
어른이 된 티라노사우루스가 킹콩이나 쥬라식공원에 나오는 것처럼
혼자 사냥을 한것이 아니라, 새끼들을 동원해서 사냥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른이 된 티라노사우루스는 그 엄청난 무게때문에 빠르게 뛸 수 없다는 추론이었다.
따라서 아직 몸집이 크지 않은 새끼들이 빠르게 달려서 초식 공룡을
세계에서 가장 강한 이빨을 가진 어미가 있는 곳으로 몰아간 후 사냥을 끝낸다는 내용이었다.
무리를 지어 사냥하는 사자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걸 본 채현이.

`불쌍해....아빠 왜....저러는 거야?`
`응...쟤네들도 배고파서 그러는거지. 채현이도 배고프면 물고기 먹잖아`
`어..그렇구낭.
  재미난 다큐멘타리를 아이와 함께 봐서 좋았다. 그런데....

2.
사실 그 다큐멘타리는
밀린 원고를 쓰다말고,짬짬이 쇼파에 가서 딸과 함께 본 것이다.
아이에겐 그게 아주 인상이 깊었나보다.
8시 40분경 다큐멘타리가 끝나고, 슬슬 내일 딸 보육원 준비며, 잘 채비를 해야할 시간!
이른바 휴일이 막을 내리는 시점.
그러나 나는 일본어 관련해서 집 근처 사코다 상 집에 가서 여러가지 질문을 할 게 있었다.
하루종일 비가 오고 있어서, 밤인데도 더 어두운 거 같았다.
조용히 나간다는 것이, 채현이가 눈치챘다...

`채현이도 갈꺼야`
옷...이 비오는 날, 또 가서 여러가지 질문을 해야되는 상황에서 데려갈 수는 없다.

`채현아 아빠랑 같이 가면 안돼.`
`너 아까 공룡 봤지? 아빠 저 어두운 밖에 나가서 공룡 잡으로 가는거야. 나가면 아주 무서워!!`


  후훗..티라노 사우루스가 사냥하는 것을 봤으니, 무섭겠지?

`채현이도 잡으러 갈래!!`
헛...너도...? 무서운데..

`허허..채현아, 너 가면 아까 공룡한테 잡아먹힌다. 우왕..이러면서 위험해`
`괜찮아. 아빠랑 같이 있으면 돼`

윽, 갑자기 물귀신 작전이네...- -+

`아냐. 잡아 먹혀. 아빠는 도망갈꺼거든`
`왜? 도망가`
`왜?..음....무섭잖아`

우씨..논리에서 밀리네...
그렇다고 아빠가 지켜줄 수 있지 물론, 이러면 따라 나설테고
흠 어떻게 한담.
역시 딸을 버리고 가는 아빠가 되는 수 밖에 없다.

3.
  결국  
  나 대신 처가 공룡이 되었다. 채현이를 물고 안 놓아주었다.
  그 틈을 타서 탈출 성공.....

  딸래미는 울고불고....이 밤에 나가는 내가 잘못이지. - -;;
  하지만 일단 오늘 꼭 정리할 일이어서 갈 수 밖에 없다.
   
  오늘 아침..
  채현이 왈.

 
`아빠 공룡 잡아왔어?`

  한술 더 떠, 아내가 한마디 한다.
`어제 11시 반까지 공룡 잡아오는 거 보겠다고, 2시간 내내 안자던데`

  ㅜ.ㅜ 1억년전 지구를 지배한 동물을 내가 무슨 수로 잡아오냐.
  다 말 잘 못 꺼낸 내 업보지........둘리라도 있다면...사가지고 가는건데.
  좋다.
  다음주나 해서 진짜 공룡 잡으러 치바 마쿠하리에서 열리는 공룡전에 데리고 가야겠다.
  가서 이거 다 내가 잡아온 거라고 해야겠군..ㅋㅋ..

  채현!!
  you won!!


4.
  이제 애들한테 말 대충 둘러대다간 못 이긴다.  말조심 해야겠다.
물론 말조심 한다고 아이 고집을 이긴다는 보장도 없다.

출처 : 당그니의 좌충우돌 일본어
글쓴이 : 당그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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