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나의 흑백필름

한여름의 메리 크리스마스

dangunee 2008. 5. 7. 02:10
1.
MERRY CHRIST AS

내 방문에 붙어있는 플라스틱 스티커다. M은 떨어져서 어딘가로 가버렸다.
작년 겨울 딸이 이 집에 다녀가면서 붙여놓고 간 것이다.
이미 '메리 크리스마스' 주위에 붙은 트리 스티커는 대부분 떨어졌고, 이제 글자만 떨어지는 날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이 스티커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지난번에 주인집 가족이 우리집에 잠깐 다녀가면서 다시 알게 되었다. 주인집에도 초등학생 딸이 있기 때문이다. 그 딸이 '앗, 메리 크리스마스가 문에 붙어 있어'라고 해서 문득 쳐다보니 채현이가 붙이고 간 것이었다.

2.
이 스티커는 그 동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내게 알게 해준다.

작년 늦가을 혼자서 썰렁한 이 집에 들어온 지... 벌써 반년이 흘렀다.

춥디 추웠던 이 집은 그 나름대로 포근했고,
철로변이라 낯설기만 했던 이 집에 그나마 정이 들었다.

일본 속담으로 住めば都 (사는 곳이 수도다)란 말이 있다.
어디든 살다보면 그곳에 정이 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있으면 딸이 일본에 온다. 와이프도.
다시 한국에서 틀었던 둥지를 모두 처분하고 일본으로 다 건너오라고 했다.

솔직히 이곳에 온다고 해서 미래가 밝은 지는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나도 참 웃기는 사람이다.
잠깐 일본에 구경차(?) 6개월 떠났다가 그게 7년이 되었고,
그래서 한국이 너무 그리워서 7년만에 모든 걸 정리하고 다시 들어갔다.

그러나 한국은 내가 그리워한 것 만큼이나 변해있었다.
친구들도 선배들도, 땅값도, 도시도...
그리고 어떻게 말하면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회사 복직이라는 명분은 있었지만, 내가 들어가서 무언가를 하고 어쩌고 할 때가 아니었다.
물론 다시 일본에 돌아왔을때 내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은 아니다.

블로그는 계속 하고 있었고, 회사도 다시 원래 그랬듯이 아는 사람들 속에서 다녔던 거고, 그냥 잠깐 한국에 프리랜서로서 짧고도 긴 여행을 다녀온 셈 쳤다. 그래도 한국에서 다시 마련한 살림은 처분하고 싶지 않았다. 벌써 몇번째 처분하는 건가. 이번에 처분하면 세번째다. 결혼 후 아내와 나는 제대로 된 살림을 가지고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늘 조금 쓰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고 살았다. 그야말로 유목민이다. 그런데 웃긴 것은 살다보니 그렇게 많은 것을 갖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진다는 사실이다.

물론 아내는 이번 일본행으로 더 이상 정착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나도 그러고 싶다. 그러나 세상일은 모르는게 아닌가.

3.
딸이 돌아오고 한여름에 붙어 있는
'메리크리스마스' 스티커를 보고 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지난 6개월간 딸이 없는 시간을 보내다보니, 문득 딸과 함께한 지난 5년간의 시간이 계속 스쳐지나갔다.

같이 식탁을 둘러싸고 밥을 먹을 때, 목욕을 시켜주던 풍경, 흙장난 하러 동네 공원에 데리고 간 풍경, 한국에서 같이 수영장에 간 풍경.
그 때 하루 하루, 딸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그저 부모로서 지켜보기만 하는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었는지, 부모가 된 사람들이라면 다 알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떨어져서 지내는 시간이 반년을 넘기면 안될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잘 살겠다고!'
'얼마나 좋은 교육 시키겠다고'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 살아야할까.
그냥 망해도 같이 살 부비며 사는 게 가족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오늘 5월말 나는
아주 즐거운 마음으로 나리타공항에 갈 수 있게 되었다.

딸이 돌아와서, 토요일이면 같이 빵을 사러 가고,
동화책도 아주 재미있게 읽어줘야지.

그리고, 앞으로는 이렇게 쭉 아주 평범하게 그냥 그렇게 살아가야지.

하여, 이번 크리스마스는
앞으로도 반년이 남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