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그니렌즈속 일본

일본 전철에서 싸움이 발생한다면?

dangunee 2008. 1. 11. 02:00

1.
얼마전 퇴근길에서 일본사람들끼리 시비가 붙은 일이 있었다.
일본 전철로 통학,출퇴근 7년만에 시비가 붙은 경우를 본 적은 처음이어서
관심있게(?) 지켜보았다.

시비가 붙은 사람은 둘다 40대 샐러리맨인데
한사람은 머리에 새치가 많은 사람이었고 또 한사람은 뿔테가 인상적인 사람이었다.
새치가 많은 사람은 약간 통통했고, 뿔테를 쓴 사람은 키가 컸다.
(이하 '새치' 와 '뿔테'로 줄여서 명명)

전철안에서 갑자기 '사과해!!!(아야마리나사이)'라는 큰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새치'가 술에 약간 취했는데, '뿔테'를 살짝 건드린 모양이다.
'뿔테'가 사과를 요구 했건만, '새치'가 빈정댄 모양이다.

둘은 두 정거장 정도 궁시렁 궁시렁 지루한 말싸움을 이어가다
 서로 밀고 밀치는 찰나에 상황이 급반전.
이때 새치가 뿔떼에게 밀려서 앞에 앉은 한 30대 작업복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다.
(사실 주저 앉은 것도 아니라 그저 가까이 갔을 뿐이다.)
그러자 이 30대 작업복 남자가 벌떡 일어서더니 '새치' 엉덩이를 발로 차고 나서 '참전'을 선언한다. (이하 작업복)

원래 일본사람들은 다른 일에 관여을 잘 안하는데 '작업복'이 참다 참다 열이 받은 모양이다.
문제는 그 다음.
이 작업복은 일어나자마자 '새치'의 멱살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작업복'이 약간 한 성깔 하게 생겨서인지 '새치'아저씨가 빈정거림을 중단, 순식간에 '스미마셍'을 '작업복'에게 연발하는 것이 아닌가. 정작 사과해야할 사람은 '뿔테'인데....

'스미마셍'
'와따시와 우에노데 오리마스'(저는 우에노에서 내립니다)

'와따시와 우에노데 오리마스'(저는 우에노에서 내립니다)

신기한 것은 '작업복'이 새치 아저씨를 연신 밀어제끼는 사이에 전철 내에서 목소리를 크게 냈던 '뿔떼'는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즉 이 둘은 '작업복'이 참전함으로써 순식간에 쫄아서 평소 조용한 일본인 모드로 급반전, 한사람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고 또 한 사람은 작업복 손에 걸려서 몇번이고 사과를 반복하다가 겨우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 신쥬쿠역 - 수많은 전철이 교차하는 역이다. 출퇴근시간에 전철에 낑겨타는 것도 일이다.

2.
사실 한국에서 30대가 40대끼리 말싸움에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는한 웬만하면 끼어들지 못한다. 또한 끼어든다 하더라도 30대는 40대에게 경어를 쓰면서 조언을 구할 것이고, 만약 40대가 술에 취했다면 30대에게 '나이부터 따지고 들 가능성이 농후하다(상대가 완전히 조폭이 아닌 이상).
그러나 일본에서는 개인적으로 아는 관계가 아닌 이상에는 사회에서 문제 발생했을때는 '힘센 놈이 장땡인 상황이 된다.'

30대가 반말을 하면서 40대의 멱살을 잡고 뒤흔들어도 일본에서는 나이는 그리 크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누가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여기서 초점은 누가  전철에서 소란스러운 행위를 했느냐는 점이다.

나는 이런 상황을 보면서 한국에서는 회사, 학교 등 어떤 서열이 정해지지 않은 일반 사회, 공공장소에서 힘의 우선 관계는 주먹도 있지만 '나이'도 상당한 부분을 차지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나이 어린 사람이 나이 든 사람 싸움에 끼어들기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3.
나이 이야기가 나온 김에 좀더 한다면,
일본에서 '나이'란 그저 '나이'를 뜻할 뿐이지 그것이 하나의 권력이 될 수는 없다.

유학생 시절 일본인 동급생들은 나보다 나이가 5-6살 어렸음에도 불구하고 쉽게 반말을 했고, 나도 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반면 한국에서 대학에 입학했을때 재수, 삼수, 현역, 예비역 등이 술자리에서 '나이'와 '호칭'을 정하고 나서야 갈등이 사라졌던 기억이 있다.

일본에 와서도 '유학생 모임'을 하면 우선 묻는게 '몇년생이냐'였고, 이걸로 순식간에 서열에 쫙 정해지는 웃지못할 해프닝이 있었다.
(물론 나는 그 중 연장자여서 호칭에서 덕을 본 것이 있지만 결국 술값은 제일 많이 내는 사태로 발전, 덴장할....-_-;;)

 


*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문고판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거나 아니면 이런 주간지 혹은 잡지 광고를 보면서 전철안의 무료함을 달랜다.


4.
회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나이는 어리지만 먼저 회사에 입사한 경우에는 
상사는 반말을, 연장자라도 늦게 들어온 사람은 경어를 쓴다.

그러나 10년전 한국에서 회사를 다닐때는 달랐다.
그때 나는 팀장을 맡고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은 직원이 입사했을때 '호칭'을 어떻게 부를 것인지 고심 끝에 둘다 서로 경어를 쓰는 것으로 정리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고 보면 한국은 확실히 '나이'가 나와 그 사람을 판별하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고, 이걸 무시 못한다.
심지어 외국에서는 한국인들끼리 '나이'뿐 아니라 그 나라에 몇년 살았냐가 또 중요한 짠밥 순위를 결정짓는 해괴한(?) 풍습이 자리잡고 있다.


5.
사회생활을 해보면 실제 사람들이 중요한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나이'보다 '실력'임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지만 여전히 '나이'라는 유교적 전통이 한국에서 매우 중요한 힘을 발휘하고 있고 효과적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뭐! 젊은이들이 무서워서 자리 양보를 해달라고 말하기 두려워하는 일본 노인들이나
버르장머리 없는 젊은 놈들이 노약자석에 앉았다고 호통치는 한국 어르신들이나
한일 양국의 가깝지만 매우 다른 상황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겠다.


그나저나 무엇보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사과를 요구하면서 10분이상 의기양양하던 '뿔떼' 아저씨가 대체 언제 사라졌냐는 거다.

 한국 같았으면 아마도 '나이'라는 공동전선이 형성되어서 '새치'와 함께 30대 '작업복'을 훈계하고 있지 않았을까?

 

 

* 히라가나 부터 기초문법, 현지일본어까지, 일본어에 관심있는 분은 요기로   ->당그니의 좌충우돌 일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