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연말의 필요조건

dangunee 2006. 12. 29.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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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때 애인이 없던 나는 선배들을 따라서 월미도에 갔다가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다 커플이었는데, 나만 치기어린 싱글이었다.

그냥 집에 들어가기는 싫고,
그렇다고 여자친구도 없는데 선배들하고 어울리는 것도 썰렁하고...

바닷바람이 조금만 덜 차가웠더라면 그냥 거기에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벌써 몇년전 일이더라.
적어도 10년은 전 일이다.

2.
일본에 있을때, 나는 연말에 한국에 가는게 작은 소망이었다.
하지만 가족단위로 움직이게 되면, 깨지는 돈도 만많치 않아서 이내 포기하고 만다.

그래도 행여 한국행 비행기를 구하고 나면 가슴이 콩콩콩 뛰곤 했다.

그리움을 삼키고 한국에 다녀가도, 짧은 일주일동안 휴식은 커녕
밀린 결재서류 도장찍는 기분으로 사람들을 리스트를 정해서 만나기를 반복했지만,
그렇게라도 냄새를 맡고 돌아오고 싶었다.
무리한 일정에 그래도 얼굴은 보는 거 아니냐며 강행군을 했다.
돌아오는 날쯤 되면
어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는 상상 , 혹은 토쿄의 집에 드러눕는 상상을 하곤 했다.
한 6개월은 결혼식 준비를 해온 신혼부부가 모든 행사를 끝내고 공항에서 비로소 '해방감'을 느끼는 것처럼.

3.
한국에 있으니
시간에 쫒기기 않고 그리 큰돈 드는 거 없이
가족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아직까지 한국에 들어왔다고 연락 못한 친구들도 몇명 된다)

무엇보다 일본에서 나던 연말은 뭐랄까.
쓸쓸했다.
홍백가요합전을 보고, 오셋치 먹는 풍경을 보고 하츠모데를 오라는 포스터를 줄창 보면서
때때로 추운 마루마닥에서 차가운 공기를 머금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그냥 원래 그런거라고 생각하면서 지냈는데...
견딘다는 것은 그런거다.
그냥 일부러 아무생각하지 않고 무감각해지는 것.
지나고 나면 알 수 있는 것.

한국에 있다보니 누가 날 불러주지 않아도 쓸쓸하지 않다.

4.
한해가 간다.
올해 한게 뭐가 있을까.
내가 사는 땅이 바뀌었고,
한권의 책을 냈고
딸은 5살이 되었고, 한국어가 늘었고, 대신 일본어를 까먹었고
나는 직장인에서 백수가 되었고
떡볶기와 순대, 핫도그를 포장마차에서 사먹을 수 있게 되었고
수입이 줄었고, 자유는 늘었고, 햇살의 온기를 측정하는 시간이 늘었고
내 열정에 쏟을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고
땡기면 한국영화를 극장에 가서 볼 수 있게 되었고
블로그는 때려칠까 몇번의 망설임 끝에 계속 하게 되었고...

5.
한국에 돌아와서 느끼는 것인데
한해를 보내면서
필요한 가장 중요한 성분은
데이트도 사랑도 두둑한 연말 보너스도 아니다.

때때로 G랄 같지만 자기가 자란 땅이 뿜어주는 포근한 온기이더라.
같은 언어로 가득찬 사람들이 살아가던 세상이더라.  

아마 이제 월미도를 간다면 덜 쓸쓸하겠지.
나 대신 월미도 앞바다를 볼 딸아이가 있으니.
아빠의 추억을 딸과 함께 밟을 수 있으니...


ps.
이 블로그를 찾아주시는 모든 분들...
연말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진으로 대신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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