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아내, 얼마나 이해하세요?

dangunee 2007. 12. 18. 08:46

1.
도쿄에서 혼자 살게 되었다.
남자 혼자 이곳에 살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퇴근길에 집 근처 수퍼에 들러 장을 본다.
튀김이 반액할인을 해서 50엔이다. 장바구니에 넣는다.
그러나 오늘 메뉴는 '해물탕'. 밤에 출출할때 먹으려고 바나나도 하나 골랐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오면 우선 마루 불을 켜고
출근하기 전에 예약해둔 밥이 잘 되었는지 확인 한다.

마루와 연결된 안방에 가서 먼저 TV를 켠다.
그러면 마법처럼 집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활기가 돈다.

날짜에 따라 버라이티쇼, 드라마 다양한 프로그램이 하는데,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고 적당히 가벼운 채널을 골라
볼륨을 올려놓고 저녁식사 준비를 한다.

오늘은 해물탕거리를 끓여야지
뭐 그리 복잡한 것은 없다.
일본에는 국거리라고 해봤자 주로 생선,조개,새우 등 해물류여서 물을 넣고 그저 끓이면 된다. 물이 팔팔 끓동안 장을 봐온  배추와 부추를 물로 씻어낸다음 칼로 콩콩콩 썬다. 필요한 만큼 넣고, 고추가루를 대충 뿌려서(?) 간을 맛춘다.

와이프에게 정통으로 배운 적은 없지만 혼자 살면서 몇주만에 채소를 많이 넣어야 맛있어진다는 걸 깨달았다.

물소리가 나고 냄비에서 부글부글 소리가 나는 동안에도 TV는 여전히 유쾌하다. 물론 드라마나 버라이이터 쇼가 부엌까지 잘 들릴리 없다. 그럼에도 힐끔힐끔 요리를 준비하면서 쳐다본다.

요리가 완성되면 밥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TV를 시청한다.
맛없어도 욕하지 않기!! 니손으로 니가 만들었잖냐!!

밥을 다 먹고나면 설겆이를 한다. 누가 대신 해줄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먹고나자마자 바로 해치운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쌀을 씻어놓고 예약을 해놓는다.


2.
가끔 방바닥에 머릿카락이 많은 것이 눈에 띄면  청소기를 돌려야될 때다. 청소기를 돌리고 세탁기를 본다. 양말은 벗어서 아무데나 던지지 않고 꼭 세탁기에 잘 펴서 넣어둔다. 절반정도 세탁물이 차 있다. 2/3 정도 차면 전기코드를 꽂고 세탁기를 돌린다.

나 대신 빨래를 세탁기가 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빨래가 끝나면 모조리 걷은 후 탈탈 털어서 옷은 옷걸이에 걸어서 밖에다 말린다.

다음날이고 빨래가 다 마르면 또 누가 해줄 사람이 있는 게 아니므로 잘 걷어서 가지런히 포개놓고, 정해진 수납장에 차곡차곡 정리해놓는다.

원래부터 내가 이런 성격이었는지, 아니면 혼자 살면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요즘에는 주위가 좀 어수선하다 싶으면 치우고 정리하고 뒤로 미루지 않는다. 그래야 뭔가 다른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분이다.


3.
일본에 오기 전 아내는 나를 '물가에 내놓은 어린이'처럼 혼자서 잘 살 수 있을지 무척 걱정을 했다.

'밥 잘 챙겨먹고, 머리는 이틀에 한번 꼭 감고, 빨래는 꼭 털어서 널어야 해!'
무슨 교장 훈시처럼 아내의 훈시가 맴돌았다.

안그래도 요즘,
머리는 알아서 하루에 한번 정도 감고,
밥은 누가 뭐라 그러지 않아도 꼬박꼬박 챙겨서 먹고 출근한다.
뿐만 아니라 영양부족(?)에 빠질까봐 완전식품군은 계란과 우유는 꼭 챙겨서 먹는다.

나는 보란듯이 혼자 사는데 적응을 했다.


4.
혼자서 익숙하게 몇주를 지나다보니,
한가지!!!!!
그동안 내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요즘 내가 하는 행동을 한번 돌이켜보면......

요리를 할때면 TV를 틀어놓고 그 소리가 들리거나 말거나 물로 요리재료를 씻고 다듬고 국을 끓인다.
밥을 먹고 나면 바로 설겆이를 한다.
다른 일이 바쁘지만 때�로 낮이고 밤이고 세탁기를
돌린다.
장을 보면서 며칠치 식단을 생각한다.
조금 어수선해지면 청소기를 돌린다.

어라......
이 모든 것이 아내가 했던 일이다.

그때,
한국에서 함께 살던 그때
나는 요리를 하는 아내의 TV소리가 그저 시끄러웠을 뿐이었고
그래서 'TV를 보면서도 요리가 제대로 돼?'라고 핀잔을 주기 일쑤였고  
밥을 먹고 나면 '뭐 지금 설겆이를 해!! 나중에 하자!" 하면서 밥먹자마자 치우려드는 아내를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밤늦게 세탁기를 돌리면 '이 밤중에 다른 이웃에게 피해주는 것도 좀 생각해봐!'라고 했다.
밤새 작업하느라 아침에 자려고 하면 마루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싫어서 일어나자 마자 아내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끄기 바빴던 나.
함께 쇼핑 가면 언제 끝나냐고, 꼭 필요한 것만 사라고 재촉하던 그때

이제야 비로소 아내가 했던 행동의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내가 TV를 틀어놓고 음식을 만든것도, 세탁기를 돌린 것도, 이사와서 주방에 라디오가 달려서 좋다고 기뻐한 것도 다...
가사노동이라는 빛이 안나는 작업을 묵묵히 견디게 해줄 친구가 필요했음을.

그래서 밤늦게 빨래를 세탁기에 돌려지 않으면 며칠후 가족들이 입고갈 옷과 양말이 점점 줄어든다는 것을 아내는 늘상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퇴근길에 장바구니를 들고 며칠간의 식단을 고민하는 것처럼 아내와 같이 할인마트에 그저 따라가준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내가 갈때마다 일주일치 식단을 어떻게 하면 맛있으면서 저렴하게 꾸릴 수 있을까 고민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같이 7년을 살고도 내가 알고 있는 아내의 생활은 절반밖에 없었던 거다.

TV를 켜고 시끄러움을 즐기면서 음식을 만드는 나를 보면 슬그머니 아내에게 미안해진다.


5.
얼마전 내가 혼자 사는 이곳 생활에 대해 걱정할 것 같아, 아내에게 자랑삼아

"'나 요즘 밥먹고 나면 바로 설겆이 한다!!!
왜냐면 나 말고 할 사람이 없잖아!!
놔둬봤자 해줄 사람이 있는게 아니고!"

라고 했더니
1초도 안걸려서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내 기분이 바로 그 기분이었어!!!"

..................그렇구나.
가끔 나도 설겆이나 청소를 도와준다고 도와줬던 것 같은데,
주부는 자기 말고 집안일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구나.
비로소 그동안 내가 몰랐던 '그림'이 완연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6.
낼모레면 딸과 아내가 한달간 이곳에 온다.
딸 유치원 방학 핑계로 내가 잘 살고 있나 감시(?)하러 오는 것이다.

아내가 오면 나는 그동안 잘 갈고 닦은 해물탕 솜씨를 한번 선보여야겠다.
그리고 '고맙다'는 말도 잊지 말아야지.
행여 내가 끓인 해물탕이 맛이 없다고 핀잔을 들어도 유쾌하게 웃어 넘겨야지.

살다보면
당연한 것이 꼭 당연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가끔은 외롭지만 견딜만한 이번 수업은 '대성공'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