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인생의 갈림길에서 2.

dangunee 2006. 4. 30. 00:15

▲ 길...Hans Andersen Brendekilde -Woodland Landscape[1]...

 

1.

 2000년 여름

 신당동 낡은 건물 3층 방 하나.

 일군의 만화가 지망생들이 원고작업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고물상에서 구해다준 만원짜리 선풍기는,

 드득드득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지만

 한여름 밖에서 뿜어져들어오는 열기를 밀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작업실 구석에는

 껍데기만 앙상하게 남은 라면봉지며 컵라면 용기, 휴지들이 어지러이 몰려있었고,

 책상에는 밤새 지우고 남은 찌꺼기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쇼파 하나를 두고, 번갈아가며 밀린 잠을 보충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다른사람의 의지가 아닌 자기가 뜻한 길을 선택한 이들은

 피곤을 몰랐다.

 뭐 그렇다고 이들의 미래가 장미빛이었던 아니다.

 그냥 이제 이길에 막 들어선지 얼마 안되는 시기에 갖은 열정이나, 막연한 기대감

 같은 것이 그들의 어설픈 원고 속 잉크와 함께 뒤범벅되어 있었을 뿐

 

2.

 고등학교 2학년때,  미대를 포기하고 입시경쟁에 들어선후...

 10년이 흘렀던 그때, 10년간 했던 고민.

 

 '인생을 떠밀려 살 것인가, 불투명하지만 가고 싶은 길을 갈것인가.'

 

 컴퓨터를 전공하고, 회사를 3년이나 다녔지만

 나에게 프로그래밍은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뭔가 계기가 필요했다.

 

3.

99년초부터 일본어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고,

99년말에는 만화창작반 등록을 했다.

하나는 새벽반이었고, 또 하나는 저녁반이었다.

당시 준비하는 것이 어떤 형태로 미래에 열매를 맺을지는 몰랐으나

하나의 계기로 삼았다.

 

내가 일본에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태여서

일본어 공부란 허공에 뿌려대는 주먹질 같은 것이었고,

만화반은 '살아남는 것이 최선'이라는 강사의 말에

작업을 즐기기 보다 몸으로 때우는 중이었다.

 

회사를 때려치고

9시까지 출근하지 않아도 되는날

나는 동기생들과 마련한 작업실 의자위에서

10년간 갖혀 있었던 해방감을 맛보았다.

 

뭐 그렇다고 변변한 수입이 생기는 일은 아니었고,

언젠가 데뷔를 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만 가지고 개겨볼 작정이었다.

 

4.

7월에 들어서자

나는 생뚱맞게 결혼을 두달 앞두고 있었고,

어느것 하나 확실한 건 없었다.

 

당시 아직 젊음이라는 마지막 노잣돈을

해보지 못한 곳에 투자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거라고만 생각했다.

 

작업실에 다닌지 3개월쯤 되던 날

 

새벽이 되면

만화를 그리다 말고,

싸구려 삶은 계란을 까먹으며

내가 만화와 애니메이션 사이를 갈등하고 있을때

같이 그림 그리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애니메이션을 하고 싶다면, 한국종합예술대학에 가는게 낫지 않아?"

"이렇게 원고에 머리 쳐박고 만화를 할게 아니라..."

 

꼭 애니메이션을 해야한다는 신념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지난 몇년간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키워온 꿈이란게 있었다.

 

일본을 가겠다는 생각은 2년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나

만화라는 구체적인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게다가 결혼을 앞두고 나니,

점점 그 꿈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유학자금 명목으로 내가 모아둔 퇴직금은

조금씩 생활비로 소멸되고 있었고,

일본어 학원도 안 다닌지 반년은 지나고 있었다.

 

누군가 한마디 했다.

 

"내 친구는 회사 잘 다니다가 결국 일본에 갔어"

"망할때 망하더라도 한번 가보고 망해보겠대"

 

5.

고3때

부족한 점수 가지고 어느학교를 지원할까

참 망설이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는 지나치게 심각했지만, 어차피 결론은

어느 학교를 가느냐가 아니라

이 지긋한 수험생활을 벗어나야한다는 것이다.

 

대학의 합격여부가 학과나 자질에 우선하던 그 시기,

진로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란 것도,

이미 테두리가 쳐진 네모난 사각형안에서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는 것에 다름 없었다.

 

다시 나는 자문했다.

결혼을 앞둔 이때.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가.

 

인생의 갈림길은 줄곧 내 등뒤를 쫒아오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앞을 가로막고 선택하라고 재촉한다.

 

6.

'망할때 망하더라도, 한번 가보겠다'는 말.

사실 멋진 말 같지만, 굉장히 무모한 말이기도 하다.

 

선택에는 나이가 없다고 하지만,

20대후반은 20대 초반과 다르고

30대 초반은 20대 후반과 또 다르다.

 

난 결국 일본행을 선택하기로 했다.

지난 3년간 모아둔 퇴직금 때문이었다.

얼마 안되는 박봉에서 조금씩 떼어내서 모아둔 적금.

이것은 오로지 내가 회사를 그만두고

새로 무언가를 시작할때 분명 힘이 될꺼라는 믿음속에서

모아왔던 돈이다. 이 돈은 이렇게 생활비로 사라져서는 안된다.

 

'이 돈은 네가 꿈을 위해서 조금씩 모은것이니

생활비가 아니라, 꼭 그곳에 쓰여져야한다."

 

그 다음날

나는 3년간 모아둔 적금을 깨서

유학원에 학비로 냈고, 그걸로 만화가 지망생 생활도 끝났다.

남은 것은 선택한 길을 후회하지 않는 것 뿐.

 

7.

선택이란

여러개 중에서 좋은 것을 고르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빼고 나머지는 버리는 것이라고

 

길이라는 거, 모두 가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늘 그렇듯이,

선택은 항상 어렵고 괴로운 것이지만,

그때 필요한 것은 어떤 대단한 것이 아니라,

용기와 준비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선택한 이상, 뒤돌아보지는 말자.

그렇게 가는 거야.

 

8.

신당동 작업실은 2000년 그해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몇몇은 문하생으로 들어갔고, 몇몇은 개인적인 작업을 하다가, 결국 게임회사로 들어갔다.

 

나는 그 2 년후 우선은 대충, 애니메이션으로 먹고 살 수 있게 되었고

엉뚱하게 만화도 그리고 있다.

 

문득 6년전,

노오란 햇살 속을 부유하던 먼지가 내려앉던 잉크 묻은 원고와

꿈만이라도 즐거웠던 그들의 피곤한 어깨를 식혀주던 그 낡은 선풍기를 떠올리며.

 

다르르르르 다르르르르.....

 

뭐야. 결국 같은 길이었네.

 

인생은 늘 제 속도에 따라 저절로 흘러기기도 하지만.

결국 길이란 만나는 것이라고.

 

 

인생의 갈림길에서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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