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후기> 태어나서 가장 꽃을 많이 받던 날

dangunee 2006. 5. 27. 10:20

1.
누구나 인생에서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있다.
시험 점수를 잘 받았다거나, 대학에 합격했을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해서 승낙을 받았을때
등등...
그러나 무대의 주인공이 되는 경우는 약간 드물다.

보통 모든 사람은 한번은 무대의 주인공이 된다.
그건 바로 결혼식.
모든 사람이 결혼하는 신랑,신부를 보러 온다.
이 당사자가 빠져버리면 그 결혼식은 아예 성립이 될 수 없다.

내가 싸인회를 갈때 기분이 그런 것이었다.
결혼식을 앞둔 총각같은 기분. 한국으로 떠나기 하루 전이었다.


  한국으로 가는 날, 하네다 공항 도착

2.
싸인을 내가 처음 알게된 것은 초등학교때.
학교에서 채점한 시험지를 돌려주고 부모님이 보셨는지, 확인을 도장이 아닌 싸인으로 해오라고 했을때다. 도장은 어떻게 훔쳐서든 찍어올 수 있지만, 싸인은 그게 불가능하다.
게다다 아버지 싸인은 조금 어려웠다. 하긴 다른 친구 아버지 싸인은 너무 멋지고 복잡해서 아예 흉내를 낼 엄두를 못내는 것도 있었다.
그래서 싸인을 뭐랄까, 약간 싫어했다. 아냐 그때 성적에 따라 저주하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던 것 같다. 물론 시험을 조지는 경우가 허다해서-_-, 거의 저주했다고 보면 된다.

그래도 고등학교때 내 싸인을 하나 만들었다.
그후 싸인이란 내게, 주민등록증이나 여권, 신분증명....일본 와서는 외국인 등록증, 카드 만들기, 휴대폰 변경, 택배수령등 하나의 도구일뿐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었다.

   서울로 가는 길, 도쿄도 서울도 구름 아래서 흐렸다.

3.
5월 20일 토 5시.
맙소사.
블로그에 공지하기를 컨벤션홀인데, 실제 세종문화회관을 가보니 컨퍼런스홀이었다.
뭐 그래도 대충 찾아오겠지.
행사장에 도착하니까 아직 책도 안왔고 , 출판사 분들도 안오셨다.
대신 미리 도착한 독자분들이 5-10명 정도 있었다.
나는 미리 준비해간 출석부를 가지고 가서 한명씩 물어보기 시작했다.

당그니:  "저.....싸인회 오신 분들이세요?"(당그니가 아닌 척, 행사 관계자인척)
독자분: "네. 제가 오늘 꼭 싸인을 받아야하거든요"
(오..감덩의 눈물이, 그러나 침착해야지?)
제 질문에 답하신 분은 이미 교보문고에서 친구에게 부탁받아서 한권을 사가지고 오셔서 보고 있었다.

당그니: "아하..그러세요 그...저기,이 만화 그린 사람인데요"(글적글적, 비듬 투하!!)
독자분: "아..안녕하세요. 근데요 질문이 있어요"
당그니: (홋...갑자기 질문하심 곤란한디.) 네 어떤거에요?
독자분: 만화 재미있게 봤는데요. 블로그 가보니까 애가 있더라구요. 아니 이 만화에서 결혼한지 한달만에 헤어져서 교또에 가 있는데 대체 애는 언제 생긴거에요?
당그니: 아하하 -_-;; 그 그게..저...애기는 음..월드컵때 말이죠.
독자분: 애가 막 뛰어다니고 그러는데,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당그니: 하하(태연한척) 저 그니까 이게 교또 생활을 바탕으로 한....
          음...앗 저기 다른 분 오셨네요. 도망 -_-;;
앗 열혈소녀님 방가!!!

 

         출석 체크중인 당그니..누가 보면 심문하는 줄 알겠음(두리님 못알아봐서 죄송 ㅎㅎ)

4.
잠시 탈출하여 보니까,
그러고 보니 5시 10분부터 웬 할아버지가 구석에서 꽃을 들고 계속 전화를 하고 계셨다.
소리가 점점 커진다.

5시 50분까지 행사장을 빌리기로 한 쪽 관계자가 나에게 말을 건다.
"저기요. 다른 분들 좀 조용히 좀 시켜주세요. 관계자분이시죠? 복도에서 이렇게 떠들면, 안에 나이드신분들이 계셔서 잘 안들리거든요."
당그니: 얼떨결에 ...네 -_-;; 조용히 시키겠습니다 ㅜ.ㅜ

그 중에서 할아버지가 가장 큰 소리로 통화를 하고 있어서...당그니 접근
할아버지: "아 뭐라구요. 그니까 여기 장소는 맞는데, 사람이 스무명 되는거 같은데, 김현근 이란 사람이 누군질 모르겠어!!!"
당그니: (앗..내 이야기네.) 저기 제가 그 사람인데요
할아버지: (통화하다 말고) 아 그래요? 진짜 맞아요. 진짜로?
당그니: 네..접니다.
할아버지: 진짜 맞지? 진짜?
당그니: 네 맞아요.
할아버지: 휴...이거 꽃 배달 왔씨유!!
당그니: 아..네 -_-;;
할아버지:(아직도 안심이 안된듯) 진짜 맞지유?
당그니: 네. 그런데 이거 누가 보낸거죠?
할아버지 :(잠깐 당황) 아..누가 보냈냐고. 흠..자.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다시 3분 통화 시작)
할아버지가 다시 큰 목소리로 전화한다.

"저기요 좀 조용히 해주세요."
내 등뒤로 현재 진행중인 행사관계자 목소리가 꽂힌다.

"아 네...저기 할아버지 있잖아요"
할아버지는 잠시후 "아 이 카드 안에 그분 성함이 있대유"

다음날 확인해 보니, 인터넷에서 알게 된 카페 회원 분이 감기에 걸려서 못 일어나셨는데 대신 꽃을 보내신 것이었다.(뒤늦게 감동)
토끼님 고마워요. 감동!!!
 
5.
5시 35분쯤 책이 왔다.
휴.....미리 왔어야 했는데, 출판사 마케팅 팀장(당일날 행사 진행하신 분)님 얼굴엔 땀이 범벅이었다.

당그니: "자 어서 합시다"
사람들이 줄을 쫘악 선다.
이때 교보직원 왈.
"저어기..지금 팔 수가 없거든요?"
당그니: 엥...왜요?
"원래 팔기로 한 사람이 지금 연락이 안되는데, 저는 6시에 퇴근을 해야...."
출판사 및 당그니 경악!!!
출판사:"아이쒸 그럼 우리가 팔아서 나중에 넘겨드릴께요. 됐죠"
아 낌새가 이상해 ㅜ.ㅜ
     당그니, 얼렁 싸인해줘. 저 그게요. 교보애덜이 아직 못판다구 -_-;;    (줄 다 섰구만 ㅜ.ㅜ)

6.
싸인회 시작!!
아뿔싸.
처가 한국 오기 전에 사놓았던 싸인회용 펜을 까맣게 잊고 놓고 와버린 것이다.
우씨 사람들 모으는데만 정신 팔려서 정작 싸인회에 가장 중요한 '펜'을 놓고 오다니 -_-;;
그래서 가방에서 평소 만화 그릴때 썼던 펜으로 싸인을 하기 시작했다
(혹시 싸인 받으신분들!!! 그 싸인에 썼던 펜은 만화 그릴때 썼던 펜과 같은 겁니다^^)

한분 한분 아이디로만 알고 계셨던 분들이 속속 정체를 드러낸다. 우힛..신나라.
'음 안느님 안오시네....'
  저...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우씨 이 펜 진짜 안써지네. 팬 싸인회가 아니라 펜 싸인회였다 ㅜ.ㅜ

   기다리는 분들...싸인은 아마도 차가운 활자보다 인간의 감성을 느끼고 싶어서 받는게 아닐까.

7. 강연회 시작
싸인 하다 말고 6시 10분 강연을 시작했다.
좀 유머러스하게 시작을 하고 청중을 사로잡아야지 라고 생각해서,
처음부터 가벼운 농담으로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만화 캐릭터랑 저랑 많이 틀려서 실망하셨죠?"
반응 썰렁...-_-;;

(진짜 실망했나 보네 ㅜ.ㅜ)
몇가지 이야기를 했는데 아무도 안웃는다..홋 이게 아닌데...
에라 몰겄다. 애니메이션 이야기니 정보 전달 중심으로 나가자.
그런데,
맨 앞에 계신 어머님께서 졸기 시작하셨다. ㅜ.ㅜ
'대략난감'
하긴 어머니가 '명탐정 코난'이나 보아의 AVEX를 아시겠어 ㅜ.ㅜ

어쨌거나 강연회 및 싸인회 무사 완료^^
휴우....

내 생애 그렇게 많은 꽃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감동이었다. (주신 분들 감사드립니다)

세종문화회관 컨퍼런스 홀

오마이뉴스 오연호 대표님

시사 일본어 학원 원장님 축사

바쁘신데 와주신 분들.

음..사람들이 전혀 내 유머를 받아들이지 않네..난감(어머니 졸지 마세요 ㅜ.ㅜ)

태어나서 가장 꽃을 많이 받던 날 (지원아 고마워)

8.
뒤풀이가 시작되었다.
오마이 블로거 몇분(작은인장님,겨울산님,녹두님)하고, 혼자 오신 독자분들끼리 따로 자리를 잡고 나머지는 보니까 학교, 다른 대학 후배들이다.

뒷풀이 결정타는 '샴페인'터트리기
스포츠 2.0 기자 박동희님이 선물해주신 것이다.

후배가 그 삼페인을 한참 흔들기 시작, 내가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하니까,
장내에는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
순식간에 나를 무대 주인공에서 '벌레'취급을 하기 시작했다 -_-;
알베르 까뮈의 '변신'의 실제 상황이다.

"저리가 저리..이리 오지마..."
당그니: 아니 이 인간덜이 ㅜ.ㅜ

그 순간 삼페인이 펑 하고 터졌고, 장내 비명소리가..
아아아아악...

그러나 다행히도 많이 뿌리져지는 않았다.

  제 블로그 주상주 멤버분들 ㅎㅎ...아이디는 밝히지 않겠습니다. 맨 왼쪽이 동유모 사장님.
사진 잘 나왔나요.

9.
행사가 끝나고 일본에 복귀
박동희님께 삼페인 감사하다고 메신저로 말씀을 드렸다.

박동희님 왈

"허걱 맛있게 드시라고 산 고급 와인을 삼페인으로 쓰다니 ㅜ.ㅜ"
당그니: 아................................................(할말을 잃음)

10.
그제
다시 박동희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갑자기 화제가 다시 삼페인으로 -_-;;

그런데,
박동희님 왈
"저기..있잖아요 그거 물어보니까 삼페인 맞다네요"
"제가 비싼건 와인인지, 삼페인인지 구별이 안가서 ㅜ.ㅜ...와인인 줄 알고 샀는데"
옷...다행이다.

11.
번갯불에 콩구워먹듯 다녀온 싸인회.
만나고 싶었던 분들을 다 만난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나 행복한 시간이었다.
생각해보면, 2000년 일본으로 떠난 후로 가끔 한국에 올때면 늘 어느정도 근심거리를 가지고 있었다. 불안한 미래. 답답한 학교 혹은 회사 생활.
그리고 외로움
그러나 5월 19일 하네다발 김포행 비행기 안에 탄 한 청년의 얼굴에는 단지 기대만이 가득차있었다.
그리고 다짐했다. 책이 출판되면, 그리고 싸인을 받으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앞으로 캐릭터 하나, 대사하나에 좀더 신경을 쓰겠노라고.
그것은 결국 창작이란, 나혼자 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독자와 함께 같이 바퀴를 굴린다는 평범한 진리를 피부로 깨닫는 계기였기 때문이다.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일치되는 경험을 갖는 경우가 별로 없는데, 그날만큼은 설레이는 소년처럼 만나고 싶었던 분들과 만나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KTX까지 타고 바쁜 시간 내주셔서 직접 와주신 분들, 세종문화회관 근처까지 오셨다가 교보문고에서 헤매시다 돌아가신 분, 싸인회 가야 한다고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까지 쳐놓고 고객에 와서 결국 발만 동동 구르다 못오신 분, 야간 알바하신후 가야한다는 마음은 있었으나 수마와 싸우면서 사경을 헤매신 분, 지독한 감기 걸려서 몸 대신 꽃을 보내신 분, 집을 내놓았는데 우연히 싸인회 시간에 맞춰서 손님이 오시는 바람에 발발 동동 구르셨던 분, 동아리 선배 협박에 다른 곳에 끌려가야(?)했던 분 등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더 열심히 살께요.

       그날 아침 7시까지 학교 후배들하고 술 파티를 ㅜ.ㅜ...후배들이 축하한다고 케익까지 사줬다.


<후기 끄읕>

ps1. 싸인회때 만난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로 한 꼭지 더 씁니다.

6월3일 토 5시반부터 록뽕기에서 번개있습니다.(자세한 사항은 공지 코너를 참고하세요)

'인생의 갈림길에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하루방과 함께 딸려온 쪽지.  (0) 2006.06.04
가끔 찾아온 우울  (0) 2006.05.28
인생의 갈림길에서 2.  (0) 2006.04.30
먼훗날에  (0) 2006.04.14
낙화는 겨울과의 약속  (0) 2006.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