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미희네집

dangunee 2006. 7. 14. 23:14

1.


 2주전 한국에서 대학후배가 찾아왔다. 근 6년만이다. 나랑 같은 문학회에서 뒹굴던 후배는 그때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다. 내가 졸업하고 대학때 배운 전공을 때려치고 환쟁이(?)의 길에 들어섰듯이 그 녀석도 프로그래머의 길을 버리고, 의대로 방향을 틀었다.

 


 세기가 바뀐 후 나는 '애니메이터'로, 그 녀석은 의대 본과 졸업을 1년 앞두고 있다. 그런 녀석이 뜬금없이 일본에 놀러온 것이다. 그날 밤 나와 그 후배는 새벽 3시까지 술을 마셨다. 그때처럼 독하게 술을 왕창 들이붓지는 않았고, 넘쳐나는 열정도 없었고, 궤변에, 세상의 모든 철학까지 끌어대서 자기 맘에 안드는 모든것을 단죄하는 자리도 아니었지만, 오래된 인연과의 만남은 잘 익은 술 향기 같은 게 난다.

 

 그와 나는 처와 애기가 마루 옆방에서 자는 탓에, 마루에서 나와 현관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술을 마셨지만, 술을 마시다 보니 그와 자주 갔던 술집이 자연스레 오버랩되었다.


 


2.








▲ 일본에서 참이슬 됫병과 지인만 있으면 그날은 천국(?) 가는 날이다. 여기서 천국이란 ???^^


12년전 학교앞에 있던 술집


 일명 '미희네 집'


 무슨 세미나나 합평회(:시,소설을 누군가 써오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인간들이 갖은 잘난체를 다하면서 남의 창작물에 욕설을 집단적으로 퍼붓는 짓 ㅎㅎ) 등을 끝내고 선배들이 자주 그집을 찾았고, 그래서 나도 선배가 된 다음 후배들을 데리고 자연스럽게 그 집을 찾았다.


그냥 쉬운 말로 하면 주머니 사정이 뻔한 대학생들의 단골 술집이었다.


 


'미희네 집'은 장사가 잘 되었다. 허름한 미닫이 문 안에 여러개의 테이블이 옹기종기 모여있고, 바닥은 시멘트 바닥에다 특별히 인테리어라고 할 것도 없었다. 학생들이 많이 몰리면 심지어 여름에는 가게 뒷 마당까지 테이블을 펼치고 장사를 했다. 한마디로 학생 반 술 반 이러면 딱 맞을 것이다.


 


'미희네 집'의 유래는 그 집 주인부부의 딸 이름이 '미희'(가명)이기 때문인데, 미희도 가끔은 와서 가겟일을 도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 집의 초 울트라 캡숑(?) 주인공은 바로 '미희엄마'였다. 일명 미희아줌마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에 강인한 인상을 지니신 분이었는데, 손이 커서 그런데 순대 1인분을 시키면 한 3인분은 퍼다 주셨다.  물론 돈 없는 학생들은 그냥 기본안주로 나오는 김치만 시켜도 되었던 곳이다.


 그리고 학생들에게 반말을 써가며 장사하시면서 술도 한잔 받아 드시고, 학생들이 관념적인 고민도 들어주시는 모습을 보면 술맛이 안오를 수가 없었다. 신명이 넘쳐나는 곳이라고 해야하나.


 


 미희네는 그러니까 데모하고 최루탄에 쩔어있는 학생들이 들러서 막걸리 한잔 걸치기에 딱 좋은 싸구려 술집이었던 것이다.


 


3.


 내가 동아리를 책임지는 역할을 맡게 된 다음에도 미희네를 자주 찾았다. 그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었는데, 주중에 모임이 두번정도 있었고, 기본적으로 나가는 술값은 많은 부분 회장 담당이었는데....그걸 일시불로 모두 감당하지 못할때마다 발생하는 문제, 즉 외상이 가능한 집이 '미희네 집'이었기 때문이다.


 미희아버지는 약간 다리를 절룩거리시는 분으로, 선량한 눈매를 가지신 대머리 아저씨였는데, 내가 매우(?) 송구스러운 표정으로 외상을 지면, 흔쾌히 장부에 적어주셨다. 그러면 나는 그 다음주 월요일이 되어서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혹은 가게 문이 열기가 무섭게 외상을 갚으러 가곤 했다.


 그러나 외상을 하는 날은 늘어만 갔고, 일종의 악순환은 계속 되었다.

 


 그때 우리가 하는 외상을 속칭 '갈이'라고 했다.

 선배 속도 모르는 후배들은 허구한 날 술을 먹자고 떼를 쓰는게 하루 일과이기도 했는데, 그때 돈이 없다고 하면 간단하게 한마디로 상황를 정리했다.


 '에이 미희네 가서 '갈이' 하면 되잖아요?'


 '아니 내 이름으로 '갈이'할테니 형은 그냥 시간만 내세요'

 


 물론 모든 '갈이'를 나 혼자 한건 아니다. 어쨋거나 우리는 외상을 '외상'이나, '달아둔다' 이런 표현보다 '갈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썼다. 왠지 그 술집에는 꼭 그 단어가 어울렸다...당시 어원은 전혀 몰랐다. 그때 내 생각에는 '외상장부를 갈아대다'해서 '갈이'라고 하는 줄 알았다.

 

 어쨌거나 '갈이'는 일상이었고, 용돈은 족족 '갈이'를 없애는데 쓰였다.

 

 미희네집은 내가 학교를 졸업할 무렵 장사가 잘 되어서 학교에서 떠나 더 큰 동네로 가서 장사를 크게 벌였는데 결국 장사가 안되어서 다시 학교근처로 돌아와 작은 가게로 다시 시작하고 있었다. 그랬거나 말거나 우리의 중요한 시국토론(?)은 강의실에서가 아니라 미희네집, 일명 '미희네 학교'에서 대부분 이루어졌다.


  졸업함과 동시에 나는 미희네 집을 잊었고, 그 일년후에는 더이상 학교를 찾지 않았다.



 


4.

  후배는 한국에서 진로소주 됫병을 들고 왔는데(본인이 사오라 강요^^), 그 녀석이 다녀간 후 생각해보니 그가 가져온 것은 다름아닌 '한아름의 추억'이었다. 나랑 대학생활을 3년정도 같이 한 만큼,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시간을 보냈던 '미희네 풍경'을 몰고 온 것이다.

 

 그리고 '미희네'하면 역시 나에게 가장 먼저 떠올랐던 단어가 바로 '갈이'였다. 그래서 농담조로 후배랑 이야기를 이런 이야기를 나눴는데


 '야 너 의사되면 내 수술비는 전부 공짜 아니면 '갈이'다!!'


 후배" ^.........................^ "


 몇년만에 내입에서 다시 튀어나온 단어 '갈이'!! 바로 이때 나는 비로소 이 '갈이'가 우리나라 말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갈이'는 '가리'였던 것이다.


 일본어에서 빌린다는 뜻의 '가리루'라는 동사가 있다. '借りる(かりる)'라고 하는데 빌릴 借를 써서...명사형으로 '가리'라 한다. 즉 '갈이'는 바로 '가리'의 일본어였던 것이다. 뭐 다 아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떠벌인다고 하시는 분도 있었겠지만, 나는 일본어를 공부하면서 순 우리말 혹은 사투리라고 생각했던 것이 상당수 일본어에서 왔다는 것에 많이 놀랬다.


 탄핵사태때 나온 '난닝구'부대도 전라도 사투리가 아니라 '런닝셔츠'의 런닝 발음이 안돼 일본인들이 '란닝구'로 바뀐 것이 두음법칙의 화려한 적용(?)까지 받고 '난닝구'라는 국적불명의 언어가 되었던 것이다. 쯔메키리나 등등 더 많지만 나중에 쓰기로 하고....


 어쨋거나 일본 와서 일상회화가 엄청나게 발전한(?) 그 동안 '가리'와 미희네집의 '갈이'는 왜 서로 매치가 안되고 다른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을까. 


5.


 이제 내겐 나의 이름을 걸고 '외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곳은 없다. 대학때가 지금보다 훨씬 가난했고, 신용도도 훨씬 낮었건만 그때는 그래도 찾아가면 푸짐한 안주와 술을 며칠간은 공짜로 빌려서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다. (물론 가끔 레몬소주안에 바퀴벌레가 떠있기도 했으나 ㅡ.ㅡ, 대체 술 다 마신 다음 뚜껑 열어보는 놈은 뭐하는 놈이야)


 그래서 새삼스러운 깨달음 속에서도 나는 '갈이'란 말을 '가리'로 교정하지 않으려 한다. '가리'가 맞다 해도, 내 안에서는 영원히 그 시절 외상술값을 '갈이'로 기억하고 싶다. 그것은 바로 단어와 함께 숨쉬는 추억때문이기도 하고 나의 성장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아직도 미희네는 장사를 하고 있을까. 미희 아줌마는 많이 늙으셨을텐데. 미희는 시집을 갔겠지. 아저씨는 여전히 건강하신가.

 미희네 아줌마가 막 퍼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순대가 생각나는 저녁이다!!


                                                        

* 실제 일본어로 외상은 '가리'가 아니라 付け(쯔께)라고 합니다. 달아둔다는 뜻이죠.


* 예전에 쓴 글인데 오늘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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