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파리의 연인

dangunee 2005. 8. 18. 00:10
1.

 유행이 다 지난 뒤 본 드라마 [파리의 연인].

 

 사실 그들은 파리의 연인이 아니다. 파리에서 만났지만, 그들의 갈등구조는 전적으로 한국에서 드러난다. 그들은 무늬만 파리의 연인이고 사실 '서울의 연인'이다. 그들은 파리에서 비지니스맨, '한기주'와 가난한 유학생 가정부, '강태영'으로 만났지만, 한국에 오자 그들은 이제 단순히 부의 격차 뿐만이 아니라,집안과 계급과 신데렐라의 요상한 신분상승까지 겹쳐서 한국사회가 토해낼 수 있는 온갖 추악한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 관계도 극적 재미를 위한 장치로 배치되고, 그런 모든것을 덮어주는 것은 '사랑'이라는 위대한 힘(?) 하나다. 유력 자동차 회사 사장이자, 주인공 '한기주'에게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한 사랑을 위해서라면, 태영이 사는 옥탑방도, 세차장 근무도 따듯한 한폭의 수채화로 그려진다.

 중반부터 극을 끌어가는 힘은 얼토당토 않는 '사생아'를 둘러싼 비밀이 과연 폭로될 것인가, 말것인가에 전적으로 의지한다. 게다가 사랑을 뺏긴 조카 수혁이 알수없는 변신은 또 뭐란 말인가. 중간까지 보다가 그만 보려고 했으나, 결국 끝까지 보았으니 체력전에서 내가 이긴 것인지 끝까지 보게 만든 그들(극작가)이 이긴 것인지.(누가 좀 알려줘요)ㅎㅎㅎ.  한가지 확실한건 더이상 이런 류의 드라마는 안보겠다는 다짐을 했다는 것이다.

 

 

 

 

 

 

 

 

 

 

 

 

 

 

 

 

 

 

 

 

 

 

 

 

 

 

 

 

 

 

2.

  나에게는 진짜 '파리의 연인'이 있다.

  대학 1학년때 딱 한달동안 '그림 동아리'를 다니다 때려친 후로, 그림과 인연을 끊었던 나는 6년후 낡은 용산의 한 허름한 청년회 사무실에서 그들을 만났다. 그들은 이른바 화가연인이었으며, 그림으로 사회를 향해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었다. 한사람은 꽁치선생. 또 한사람은 칼치선사다. 꽁치샌님은 진짜 꽁치처럼 생긴 남자 선생님이었고, 칼치선사는 왠지 분위기가 시장바닥에서 약간 후지게 누워있는 칼치(?)와 비슷한 느낌을 내던 여자선생님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민한 '그림'에 대한 생각을 세상 사람들고 나누고자, 일반인을 위한 그림동아리를 만들었다. 이름하여 '늦바람'.  세상이 그림에 소질이 있는가 없는가를 병든 병아리 감별하듯 중고교시절부터 구분하고, 조금만 소질이 없으면 금밖으로 영원히 몰아냈던 사회에 그들은 반기를 들었다.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종이와 연필을 돌려주려고 했다.

 '자기 느낌대로 그리세요'.

 그게 칼치 선사의 첫 지도(?)였다.  

 

 회사를 다니면서, 구조조정의 대상 예비1호였던 내가 3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늦바람'때문이었다. 매주 금요일저녁이면 수업이 시작되는데,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본 수업 전에 시작되는 인물크로키였다. 회원 누구나 순번이 돌아가며 모델이 되는데, 보통 20분이 주어졌다. 나는 맨날 늦게 가는 바람에 늘 5분을 남겨놓고 허겁지겁 그리거나, 모처럼 만에 일찍 가면 내가 모델이 되기 일쑤였다. ㅜ.ㅜ. 타이밍과 정열은 그렇게 늘 엇박자로 떨어진다. 

 

 매주 금요일 밤 유일하게 예술(?)의 분위기에 휩싸인 회원들은 막차가 끊겨도 왕십리 뒷골목에서 술을 퍼마셨다. 두 선생은 죽네 사네 싸우면서 분위기가 험악하게 만들었지만, 나는 끝내 집에 가지 않았다. 그들의 작업실까지 따라가서 소주 세병정도는 쩔어있는 예술론을 귀동냥하며 술과 잠을 동시에 들이부었다. 

 

 

3.

 내가 이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보게 된 이유는 파리에서 만난 기주와 태영의 감칠맛나는 대화때문이었다.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만남과 태영의 대책없는 씩씩함이 즐거웠다. 외국에서 월세를 못내서 쫒겨난다는 것이 남의 땅에서 맛볼수 있는 가장 비참한 밑바닥임에도 태영은 씩씩해보였고, 어학교에서 사전을 들고 뒤죽박죽 불어를 하는 것을 볼때 자신이 자란 땅과 다른 세계에 도전하는 젊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어쩌면 외국생활을 하는 나로서는 어느정도 같은 공감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러므로 반 이상은 이해할 준비를 하고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난 파리라는 낯선 공간에서 그들의 좀 더 어처구니 없고, 황당한 이야기가 쏟아지길 바랬다. 어딜 가든 안방같은 고국의 도심이나 공원보다, 어딘가 낯설고 세들어 사는 거 같은 이국생활의 소란스런 삐걱거림을 담아내주길 바랬다. 그런 나의 기대는 그러나 단 2화분의 파리 촬영으로 나머지 18부를 한국에서 땜방한 제작진의 사기행각에 산산조각이 났다.

 시청자들을 티브이 앞에 파리(?) 들끓듯 모으기위해 '파리'라는 거창한 배경과 타이틀로 미끼를 내걸고 2화분 정도로 대충 눈요기를 시켜준후, 싸게 먹히는 한국을 배경으로 거침없이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파리의 연인이 18화를 서울에서 연애한다는 것은 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간다. 한국에 돌아온후 벌인 그들의 애정행각은 더군다나 파리와 아무 상관없이, 부잣집 아들과 풍비박산난 집안의 따님간 벌어지는 신데렐라 전쟁이아닌가.

   그런데도 한국사람들은 파리까지 다녀온 가난한 신데렐라를 재벌가의 며느리로 등극해주길 바라며 시청률로서 확실히 보답해줬다. 어쩔 때는 신데렐라 버전인지, 콩쥐팥쥐 버전인지는 알 수 없기도 했다. 

 

4.

 늦바람의 두 선생은 전혀 어울릴 거 같지 않은 결혼을 했고, 그후 나도 조금은 황당한(?) 결혼을 했다. 나는 살림까지 한국에 마련하고 대책없이 일본으로 떠났지만, 그들은 '늦바람'이 안정되자, 서울의 모든 살림을 처분하고 '파리'로 떠났다. 내가 '토쿄러브스토리'(?)를 찍었다면, 그들은 '파리의 연인'이 된 셈이다.

 프랑스는 어설픈 불어실력을 가진 드라마속 '태영'에게 당당하고 신나는 땅이었지만, 불어 준비를 못해간 현실속 '파리의 연인'에게는 지옥의 땅이었다. 동명의 한국사람이 예전에 같은 이름으로 은행에 계좌를 만들고 사기를 치고 떠난일이 있어서, 은행에서 본인 이름으로는 계좌도 만들지 못해 담당 선생을 데리고 가 통역을 부탁한 일 하며, 노트북에 커피를 엎질러 수리를 맞기니, 부품을 갈려면 일본에서 가져와야한다는 핑계로 한달이상 소비했던 일. 내가 일본에서 겪었던 것보다 한 10배는 더 힘들었을 것이다.

 내가 낭만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프랑스에서 산다는 것은 어떠냐고 묻자,

 칼치선사 왈, 

 '이곳은 사람이 살만한 땅이 아니야.'

 '허걱......'

 

 그래도 나는 그들의 대책없는 출발보다 열정을 높게 사고 싶었다. 어차피 가서 돈 불려 오거나 졸업사진 따위나 박기 위해서 떠난 것도 아닌데 뭘.

 

 꽁치선생은 결국 프랑스어는 포기하고, 주변의 프랑스 화가들과 함께 작업에만 매달렸고, 칼치선사는 그래도 악착같이 진학을 했다. 미술의 제국 프랑스는 이렇게 전세계 화가들은 안방에 불러 들이는 힘이 있다. 지구 반대편 일본땅에서 내가 적응하기 위해 아득바득 기고 있을때, 그 연인은 통하지 않는 언어의 땅에서 버릴건 버리고(?), 그림을 벗삼아 참선'수행'(?)을 했다.

 

  1년이 지났을 무렵 다시 같은 질문을 하자 그들의 대답은 한결 좋아졌다.

  '수행이 계속 되니, 모든 고통도 무덤덤해지는 구나.....'    

 

  그들은 드디어 외국생활의 진리가 수행을 넘어, 도의 경지에 이르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5.

 '파리의 연인'에 한국사람들이 열광한 이유는 그것이 이룰 수 없는 꿈이기 때문일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환상으로 점철된 '사랑의 꽃피는 나무'나 공부는 안하고 놀러만 다니던 '대학생들의 이야기' 따위의 드라마를 못견디게 보고 싶었던 것은 그 곳으로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던 현실이 만들어내는 몽상의 탑 때문이었다.

  절대로 재벌가의 친구들이 그깟 사랑 하나에 영혼을 대여해주고, 돼지저금통 같이 아껴줄 만큼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고현정의 이혼 파동'에서 이미 예고편으로 다 본 만큼 사람들이 현실에 대해 아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런 야무진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고, 드라마에 몰입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더이상 이룰수 없는 꿈을 태영을 통해서 이루고자 함이고, 회사에서는 휘두를 수 없는 권력을 기주를 통해 휘둘러 보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파리의 연인'은 앙상한 21세기 한국의 현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로또 같은 것이 아니면 '인생역전'을 꿈꿀 수 없다며 많은 이들이 몰려가고, 허황된 드라마의 신나는 꿈에 매달려 대리만족을 하면서 현실의 질서를 인정할때, 우리의 불평등함도 드라마 한편으로 정당화된다.

 환상이 나쁜 것은 아닐 것이다. 환상과 희망은 쌍둥이이고, 환상도 자기가 발을 한 발 내딛을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절반은 희망이니까. 환상이 독약이 되는 순간은 그리 간단히 업그레이드를 허락치 않는 인생의 질서가 박박기는 노력이 아닌, 언젠가 갑자기 찾아올지 모르는 대박의 꿈으로 손쉽게 대치될 때다. 

 하긴 현실은 성실하게 박박기는 사람에게 늘 전세값을 두배를 올리거나, 몇배로 부동산값을 올려 참담한 복수를 해댔다..ㅎㅎㅎ(웃을 대목인감 ㅜ.ㅜ). 게다가 아무런 고통의 계단을 밟지 않고도, 복권하나만 잘 긁어서 대박이 났다는 기사가 톱뉴스로 뜨는 사회 분위기라면, 그 꿈을 이루지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나오는 것이 황당한 것만도 아니다.

 내가 안타까운 건, 부자들은 자신들의 공고한 질서를 지키기 위해 오늘도 정보를 조작하고 그 정보를 공적인 장치를 통해, 저 높은 부자들의 성에 누구나 입성할 수 있다며 허황된 꿈들로 변질해 유포하는데, 일반 서민들의 무기란 겨우 복권판매대앞에서 없는 돈이라도 쪼개서 절반은 국가에 제출하고 나머지는 그 누군가에 몰아주는 것 뿐이다. 그도 아니면 화려한 드라마 주인공들의 눈부신 활약을 보면서 너절한 가슴을 달래는 것 뿐이라니...오늘 2004년 한국의 꿈은 이처럼 위태롭고 초라하다.    

 

 

6.

  작년에 딸래미 돌잔치 겸해서 한국에 잠시 들어갔던 나는 '파리의 연인'을 만나러 혜화역으로 갔다. 꽁치선생은 완전히 귀국을 했고 전시회 때문에 잠시 같이 귀국한 칼치선사, 반가운 얼굴이고,나에게 선생님이다. 

  그들은 여전히 조용하고 박제된 화랑이 아닌 어수선한 전철역에서 뜻맞는 화가들끼리 누구나 볼 수 있는 전시회를 열고 있었다. 사람들은 무료하게 지나가며 사연많은 그림들을 건성으로 훑어보고 있었고, 심지어 악의적인 사람들에 의해 찢어진 작품도 있었다.그 한구석에서 무덤덤하게 꽁치선생이 노트북으로 작업을 하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파리를 다녀왔지만, 그는 화려한 경력을 덧붙이기 위해서 그곳으로 떠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또 뭔가 엄청난 꿈을 덧칠해 온 것도 아닌 거 같았다. 꽁치선생은 그 땅에서 되지도 않는 불어로 자신을 설명하기 보다 좀더 자신에게 맞는 언어, 그림으로 소통한 게 확실하다. 그곳의 예술가들과 함께 전시회도 열고,그 땅의 예술가가 그 땅의 사람들과 지금까지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호흡하는 법을 깨닫고 온 듯 하다. 그에게 파리는 신데렐라가 왕자를 만나는 곳이 아니라, 좀더 세상를 넓게 이해하는 고행의 바다였음을 한마디 툭 던지며 알려줬다.

 

 '거기서 작업 열심히 했어!!'

 (내 불어는 때리치뿔고, 그림으로 박박 기었다 아이가)

 

 그가 프랑스에서 자신과 싸우며 창작물을 꾸준히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결코 자신있게 그런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을, 회사에 취직해 따분한 손놀림을 해대던 나는 대번에 알 수 있었다. 

  단 하나의 작품을 만들더라도 좋은 작품을 만들라는 그의 조언은 나에게 금언과도 같이 새겨졌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그림이나 영상으로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길찾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고,그 뜻은 지금도 굳건하다. 그는 단지 그 길을 계속 갈 수 있도록 자신이 기획하는 작업에 약간이나마 돈이 후원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 주여, 이땅의 모든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돈벼락이 떨어지게 해주소서 ㅜ.ㅜ 

 

  나는 다음날 그들의 새 보금자리 근처, 커피숍에서 한번 더 만났다. 오랫만에 지난 몇년간의 수행에 대해 서로 고해성사를 하며 웃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들은 없는 살림에 밥이라도 한끼 사주겠다며 나를 붙잡았다. 

 

  나는 문득, 내가 처음 한국을 떠날 때 그들이 이별기념으로 사주던 맛난 '장어구이'냄새를 기억해냈다.  

 

 

  '진짜 파리의 연인은 지금도 투쟁중이다.'

 

 

 

* 작년 9월경 쓴 글입니다.

* 한국을 떠난 이후로 늦바람에 뭐 도움 준 것은 없느나, 그래도 링크라도 걸어놓겠습니다.

   http://www.nbaram.org/

*  그림:김삼현 - 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