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갈림길에서

킹콩의 심장소리를 돌려줘...

dangunee 2006. 1. 23. 00:23

1.

 내가 킹콩을 처음 본 것은 초등학교 1학년때였던거 같다.

 아직 대부분의 가정에는 칼라 텔레비젼이 없었고, 킹콩도 흑백으로 나오던 시절.

 

 내가 살던 곳은 성남 희망대 공원 근처였는데,

 삼촌과 고모도 같은 집에 살고 있었다.

 삼촌은 당시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암튼 주말 저녁 방 구석에서 삼촌과 나는 킹콩을 보았다.

 (삼촌은 쿠션도 없이 양팔굼치와 엉덩이를 바닥에 대고 고개를 세워서 영화를 보는 놀라운 습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걸 두시간동안 꿈쩍도 안하고 보는 자세에 나는 킹콩 버금가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_-) 

 

 뭐 내가 킹콩을 좋아서 보았다기보다, 삼촌이 명화극장을 시청하고 있는 것을 보고 끼어든 것이다. 

 뭐랄까 그 원시적인 풍경과 부족 공동체를 형성하고 살던 사람들 그리고 바쳐지는 제물

 게다가 어린아이의 눈에 비친 반라의 여인과 거대한 고릴라

 뭐 이런게 호기심을 한층 자극했으리라.

 

2.

 

 그러나 맨날 밖에서 '다방구'나 하던 아이가 밤 10시를 넘겨서 시작하는 킹콩을 새벽 1시까지 본다는 것은 잠고문이 따로 없었고, 중간 중간 괴성과 공포의 장면도 나를 깊게 끌어들이는 수마로부터 건져내지는 못했다. 내가 눈을 뜨고 나니 킹콩은 어느새 뉴욕에서 난동을 부리고 있었고,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아니 킹콩이 언제 순간 이동을 했지 -_-.)

 

 그리고 긴급히 출동하는 헬기의 프로펠러소리가 텔레비젼 스피커를 통해 따갑게 내귀로 전해졌고, 킹콩의 고함소리와 함께 헬기에서는 기관총이 발사되었다.

 

 '두두두두두두두...'

 

 그 무엇이라도 때려부수었던 킹콩은 그 총알 몇방을 심장에 맞은 후 추락, 뉴욕의 차가운 콘크리트에서 눈을 감는다.

 

 물론 나도 드디어 꿈나라로 갈 수 있다는 즐거움에 킹콩이 죽었건 말건 상관없이 생전 처음 심야영화를 끝까지 보았다는 성취감에 안도했다. 솔직히 킹콩이 잠든건지 내가 잠든건지 모를 정도로.

 

▲ 킹콩의 고독?

3.

 작년 말 처와 함께 뉴 킹콩을 보았다.

 

 뉴 킹콩을 보면서도 내 기억속에서는 희미하게나마 20년전 영상이 스쳐지나가곤 했다. 거대한 나무 울타리나 제물을 바치는 장면 등.

 

 반지의 제왕의 피터잭슨의 특수효과는 놀라웠으며, 게다라 티라노사우루스까지 나와서 육박전을 벌이는 것을 보니, 이건 K1이 따로없다는 생각이 들게 했지만 아무튼 심심하지는 않았다.

(근데 왜 티라노사우르스에게 물려도 킹콩 팔은 피도 안나는 것일까? -_- 킹콩을 가장한 거대로봇이었단 말인가.)

 반지의 제왕 후편 같은 이상한 생물체의 종합선물세트의 이미지도 조금 황당했지만, 그럭저럭 볼만 했다. (어떤 의미에서 뉴킹콩이 사는 그 섬은 다양한 생물종이 서식하는 것으로 보아 쥬라기 공원보다 더 수입이 짭짤할 만한 공원으로 최적이다. 공룡에다가 고릴라도 덤으로 볼 수 있으니...)

 

  나는 심야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이미 새벽 2시까지 깨어있는 것이 기본인 내가 물론 이번에도 잠과의 사투를 할 줄이야. 이미 소주와 맥주를 한참 들이마신 다음에 들어간 극장은 수면실이 따로 없었고, 아마 배가 난파되고, 그 섬에서 킹콩이 괴성을 지르면서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아마 극장에서 내 코고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을 위험도 있었다.

 

 킹콩은 끝내 잡혀서 사람들의 볼거리로 전락했고, 그러나 그는 자신을 옭아맨 쇠사슬을 끊고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나서게 된다. 그리고 역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열심히 등반을 하는데....

 

 이십몇년만의 킹콩은 몇배의 괴력을 더 갖춰서 헬기가 아닌 비행기도 몇대 격투시키다가 추락을 하고 만다.

 

4

 초딩 1학년때 보았던 킹콩에서 가장 나에게 여운을 남긴 것은

 그 무엇보다 킹콩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떨어진 후 아스팔트를 거대하게 울려대던 그의 심장박동소리였다.

 

 둥.

 둥.

 둥.......

 

 그의 절망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끝났지만, 그는 자신의 심장소리로 세계를 울리고 있었다.

 킹콩의 고동소리는 정말이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확실히 뇌 한쪽에서 울리고 있는 거 같다.  

 

 내가 최신판 킹콩에서 바란 것도 마지막 바로 그 고동소리였다.

 

 그러나 내가 기대했던  마지막 장면에서 킹콩의 고동소리 대신 이런 대사가 흘러나왔다.

 

 '킹콩은 사랑을 위해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 올라간 것입니다'

 

  유치하지 않니...ㅜ.ㅜ

  -_-;;

 

 킹콩의 심장소리만 울리게 해줬어도, 아마 저 대사는 필요없지 않았을까.

 

 

5.

  이래서 원체험이 중요한지도 모르겠다.

 

  분명 뉴 킹콩은 확실한 볼거리와 현란한 액션, 눈부신 이미지와 리얼한 킹콩으로 더 강하게 어필할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아직도 내 머릿속에는 25년전 보았던 킹콩이 더 선명한 이미지로 남아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이 졸음과 사투를 벌이면서 보았던 거대 동물의 말못할 감정은 특수효과나 이런 것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브라운관을 통해서 전해져왔고, 그외의 원시적인 이미지도 뉴 킹콩을 보았다고 해서 하드디스크처럼 덮어씌워지지는 않았다.

 어쩌면 킹콩을 처음본 내가 아직 세상을 의심할 만한 정서를 갖거나 이미 무언가에 대해 명확하게 분류하고 정리해내는 사고의 틀을 갖추기 전이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나이를 먹고, 기술이 발전하고, 더 많은 것을 이해하게 된다하더라도,

 어쩌면 더 많은 것을 있는 그대로 느끼지 못하는게 아닐까 하고 생각해본다.

 

 그렇지 않고서야 뉴 킹콩이 올드 킹콩보다 재미 없을리가 없을텐데.

 

 훨씬 리얼하고 칼라에 현란한 효과음이 들어가 있는 무비가 왜왜....검은 흑백 텔레비젼의 조악한 화질과 스피커의 감동보다 떨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결정적인 이유는 25년전 소년은 킹콩이 진짜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고 그 영화를 보았을 거고, 지금의 나는 그런것 따위는 있을리가 없다는 전제하에 보기 때문일 것이다.

 

 덧붙여, 25년전 내눈에 비친 뉴욕은 아주 먼거리에 있는 갈 수 없는 땅이었다면, 이제 내게 뉴욕은 현실적으로 얼마간의 경제적인 가치를 지불하면 가 볼 수도 있는 현실적인 생활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 이 점 또한 킹콩이 날뛰는 공간으로서 별 영화적 감흥을 느낄 수 없는 요인이 된 것도 같다.

 

 생각해보면,

 세상에 공짜가 없듯이 나이가 들면서 현실적인 힘을 갖게되고, 세상을 알아가면 갈수록 그 반대급부로 감흥과 기대치는 점점 낮아지는 듯 하다. 어쩌면 세월이란 놈은 인간을 좀더 무감각해지게 만들고, 거대한 껍질이 조금씩 쌓이는 게 아닐까.

 

 소년이 어른이 되어 또 다른 소녀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25년의 세월은 그렇다. 아무것도 변한것 없다고 느끼는 일상의 연속이란게 얼마나 내가 또다른 세계속으로 빠르게 적응하고 변해왔고, 변해가는지 가늠하게 해준다.  

 

 문득 지금 나는,

 25년전 온가족이 함께 살던 그 안방으로 돌아가서

 흑백화면속에 잠들던 킹콩의 고동소리를 

 다시 듣고 싶다.  

 

 둥......

 

 둥......

 

 둥..... 

 

 

  ps. 인터넷을 뒤져보니 1976년 필름 컷이 있더군요. 이걸 전 흑백으로 본거죠.

        http://blog.naver.com/centenial.do?Redirect=Log&logNo=60005199160

 

▲ 내가 어린 시절 이 여인에게 홀렸단 말인가

▲ 바로 이 장면 킹콩의 가슴이 새빨간 핏물이 ㅜ.ㅜ. 아마 초딩때는 흑백이었으니 분명 검은 물이 흐르고 있었을 것! 지금 장난하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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